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여사가 지난 14일 낮 12시 야당인 민주주의 민족동맹 당사 앞에 모인 1만여명의 지지자들에게 "국민이 정부를 감독할 때 민주주의가 달성될 수 있다"며 "희망과 언론자유"를 외쳤다. 아웅산 수치여사(65)는 미얀마의 독립운동을 하고 머지않아 독립과 함께 실질적인 총리가 될 아웅산 장군과 탁월한 외교관인 컨 치가 인도대사의 딸로 버마와 인도 그리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결혼하여 두 명의 아이들이 있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돌보고자 버마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곳에서 버마군사정권의 만행을 보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1948년 1월 4일 영국에서 독립하며, 국호를 '버마연맹'으로 하며,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했으나, 1962년 쿠데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마침내,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 8분 버마 랭군에서 10만여명의 시민이 나선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26년간 독재를 휘둘러온 군사정권에 맞서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오자, 승려, 근로자, 가정주부까지 거리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정부군이 시위대에 총을 쏘아 3000여명이 숨졌다. 이 유혈사태는 '8888 항쟁'이라고 불린다.

수치여사는 네윈의 잔인하고 동정심 없는 통치에 대항해 민주주의와 안전을 위한 비폭력 투쟁을 시작하게 됐다. 1989년 6월 군부는 국명을 '미얀마'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꿨다.
그녀의 투쟁은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 실시의 성과를 거뒀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에서 그녀의 야당이 군부세력인 여당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뒀다. 그러나 군부는 그 선거 결과를 무시했다.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치는 1995년 7월에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1998년 대표위원회의 구성을 발표하고, 그 위원회가 나라의 합법적인 통치의회라고 선언했다. 군사정권은 2000년 9월부터 2002년 5월까지 또다시 아웅산 수치를 가택 연금했다. 2003년에 민족자주연합과 정부시위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자 정부는 그녀를 다시 가택 연금한 것이다. 지난 7일 미얀마총선에서 친군부정당이 80% 넘는 의석을 차지했는데, 수치여사를 21년 동안 15년이라는 오랜 가택연금생활에서 풀어준 것은 군 당국자들이 자신에 찬 행위인지, 아니면 정치군인들이 수십년간 입었던 군복을 신사복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국제사회는 민주화 영웅의 석방을 일제히 환영했다. 특히, 토르비오에른 야글란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의장은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을 위해 오슬로를 방문해달라고 초청했다. 수치여사의 1991년 수상식에 아들이 대신 참석했었다. 이에 비해 김대중은 행운아였다. 그는 직접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많은 지지자가 수상식에 참석해 축하해주었다. 1961년 5ㆍ16 이후, 군사권위주의정부에 의해 납치돼 배 위에서 바다로 던져질 위기상황에서 목숨이 건져진 그의 민주화운동은 수치여사보다 더 큰 고통과 시련을 겪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1979년의 12ㆍ12와 1980년의 5ㆍ17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법정 사형선고라는 판결까지 내렸다. 5ㆍ16 이후 18년간, 5ㆍ17 이후 7년간 모두 25년간의 독재정치하에서 일어난 일이니, 미얀마의 경우와 유사한 것이라 비교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미얀마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 것은 김영삼의 가택연금, 김대중의 죽음위기와 함께 한국인의 위대한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영광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돌아간 것이다.

수치여사의 석방을 놓고 온 세계가 환영하고 축하하는데, 중국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반체제 인사인 류사오보의 올해 평화상 수상자 선정으로 불만이 많은 중국지도자는 논평을 내지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류사오보의 수상식 참가를 허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세계경제의 으뜸을 달리는 중국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 북한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세계평화의 길도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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