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이선경 의사는 수원출신이다. 이 의사는 1904년 4월 30일 수원면 산루리 지금의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나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하면서부터 동료 학우들과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하고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재학 중에도 항일운동의 요람인 수원교회의 교사로 활동했고 더불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당시 수원 청년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노적, 박선태 등과 같은 산루리 출신이었던 이 의사는 김세환 밑에서 각지의 연락임무를 담당했다. 치마 속에, 혹은 앞가슴에 비밀문서를 숨겨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대전, 청주, 안성 등지로 수십 차례에 걸쳐 비밀지령을 전달했다.

이 의사는 박선태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담당했으며 3·1운동 이후 수원면 서호 부근에서 혈복단(血復團)을 구국민단(救國閔團)으로 개칭하는 논의에 참여해 구제부장을 맡았다. 1주일마다 나오는 독립신문 배포 등을 논의하면서 상해 임시정부 적십자회에 들어가 간호원이 돼 후일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 힘을 다하고자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 의사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체포됐다.

체포 당시 심문과정을 보면 그의 애국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언제부터 조선 독립에 대해 생각을 했는가?" "어른들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들었으니 태어났을 때부터요."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 "그렇소, 석방돼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결국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이 의사는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일제의 모진 고문에 지쳐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수원시민 중에 여전히 이 의사의 삶과 독립운동 활약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긴 경기도나 수원시 등 행정기관부터 마땅히 해야 할 기념행사조차 소홀히 하는 마당에 시민을 탓할 계제는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는 물론이거니와 기념비, 기념관, 동상, 숭모회 등이 마련돼 있다. 여성 독립운동의 표상인 이선경 의사는 부유한 집안을 마다하고 항일투쟁에 나선 10대 소녀로서 "나라를 구하는 데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절규하며 민족의식을 몸소 실천했다. 이 갸륵한 뜻에 우리 후손이 숭모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영달을 버리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에게 자랑스러운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가 있음을 일깨우는 효과적 방법이기도 하다.

이선경 의사의 자취는 역사 속에 우뚝 솟아있다. 지금이라도 그를 숭모할 동상과 기념비 건립 행사 등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간 홍보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들어봐야 한다. 그래서 3·1운동에 결집됐던 시민정신에서 큰 교훈을 얻어야 한다. 3·1절은 이 같은 각오를 다지고 그 정신으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자세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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