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48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김세환 선생은 1888년 11월 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났다.

 

격동의 한국근대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 시대, 작가 홍성원의 말대로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를 살았다. 그의 소년기 역시 변화의 물결 위에 있었는데, 수원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시점이었다.

1901년 성안 보시동에 감리교회가 들어섰다. 지금의 북수동 수원 종로교회인데, 그가 태어난 남수동에서 가까운 그곳을 소년 김세환이 출입했다.

김세환은 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교육가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꿈을 키워 나갔다. 이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로 진학하여 공부했던 김세환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세환은 고향 수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강습소 직조 감독관으로 일하며 동시에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수원의 조선인 상업인들이 주도한 수원상업회의소는 1908년 4월 15일 수원 남수동에서 설립됐고, 이듬해 수원상업회의소 안에 ‘상업에 관한 지식, 기능의 강습’을 목적으로 상업강습소를 설치했다. 이에 상업강습소는 낮에는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야학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1915년 일제는 상업회의소령을 발포, 기존의 상업회의소에 대한 견제를 했다. 이에 1916년 4월 수원상업회의소가 해체되면서 강습소는 폐쇄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상업강습소를 주학으로 전환하여 화성학원(華城學院)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할 수 있었다. 지금의 수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3년 김세환은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했다.

김세환이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할 당시 수원군의 교육상황은 여전히 서당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삼일여학교 학감인 김세환은 학교를 자주 비우는 밀러 교장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삼일여학교를 새롭게 단장하는 등의 열성과 더불어 그는 학교 건물에 한반도 지도를 조각해 넣음으로써 학생들과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했다. 또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 앞 개울(수원천) 위로 다리를 놓았다.

삼일여학교는 화홍문과 매향교 중간에 위치하여 당시 학생들은 학교 앞 수원천의 징검다리를 건너 다녔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학생들은 화홍문과 매향교로 돌아 다녀야 하는 불편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김세환은 학교 앞 수원천 위에 쇠줄을 걸고 그 위에 화성 팔달문 문짝을 올려놓은 쇠다리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쇠다리는 1920년(庚申年) 장마로 유실됐다.

이후 삼일학교 앞 다리는 1926년 봄 삼일여학교에서 1400원의 거금을 들여 6개월만에 개설하고 이름도 새롭게 ‘삼일교(三一橋)’로 명명해 새로운 명물이 될 수 있었다.

이렇듯 삼일여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김세환은 불멸의 업적을 남기게 됐다. 즉 삼일여학교를 명실상부한 학교로 자리매김한 것과 함께 1919년 민족사적 분수령이었던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이다.

김세환은 YMCA 간사였던 박희도를 통해 1919년 2월 10일경 3·1운동 준비 모임에 참가했다.

이에 충남지역과 수원지역의 조직 책임자가 되어 활동했는데, 충남 해미의 김병제, 수원 남양교회 동석기, 수원 종로교회 임응순, 오산교회 김광식, 이천교회 이강백 등을 만나 민족대표로 서명하도록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김세환의 서울 도착이 늦어져 독립선언서에 기명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독립선언서에 기명은 하지 못했다.

또한 수원시내의 3·1운동 역시 김세환과 밀접한 연관과 주도적 역할이 있었다.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김노적은 수원상업강습소 제2회 졸업생으로 김세환의 제자였고, 박선태는 수원상업강습소 보조교사로 그의 후배였다.

애당초 김세환과 김노적은 수원시내 3·1운동을 삼일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수원시내를 거쳐 화성학원까지 가는 만세시위로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탐지됨에 따라 저녁 횃불시위로 대체됐다.

이에 3월 1일 저녁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수백명이 모여 횃불시위를 펼쳐 봉수대, 팔달산 화성장대 등 20여 곳에서 횃불이 올랐다.

이러한 횃불시위는 수원군 전역으로 퍼져 나가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한 만세항쟁을 펼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세환은 곧바로 수원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이미 수원에서도 만세 주동자들의 체포가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세환은 1919년 3월 12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법정에 섰다.

“아무리 세계대세로 병합이 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는 이슬도 눈물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지경이었다.”라고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논리정연하게 답하는 그였다.

재판장이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속 운동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김세환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짧고 명료하게 대답해 방청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김세환은 1920년 10월에 석방되어 수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에 따라 삼일여학교 교사로 복직하지 못하고 수원시내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과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유지로 역할하며 여러 사회단체를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연합조직이었던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28년 8월 19일 개최된 임시대회에서 신간회 수원지회장으로 선출됐다. 또한 외곽조직인 수원체육회를 조직해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김세환은 화성학원과 삼일학교 및 종로교회를 근거로 활동하며 수원지역의 유지로 활동했다. 동시에 김세환은 평생 술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이 세운 원칙에 충실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간회 활동 이후 1930년대 독립운동 선상에서 김세환의 도드라진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친일의 흔적은 더욱 보이지 않는다. 치욕적인 일제강점기를 양심있는 지식인으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김세환의 삶에서 주목돼져야 할 것은 수원지역 교육계에서 한 빛나는 역할이다.

1939년 삼일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처하자 그가 나서 수원출신 갑부 최상희씨를 움직여 1만원의 희사를 받아 회생하게 했던 점과 1941년 일제당국과 교섭하여 폐교되었던 화성학원을 수원상업학교로 다시 설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상업강습소-화성학원-수원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고난에 찬 100년의 역사에서 김세환 선생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은 정녕 장대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세환 선생은 1945년 9월 16일 수원의 자택에서 운명했다. 해방된 조국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였다. 정부는 김세환의 업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도움말=수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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