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명지 잘라 조선독립원을 쓰는 남자현 여사의 굳은 의지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으랴 
핏덩이 아들 두고 늙으신 노모 앞서 죽음 택한 의병장 남편
왜놈 칼 맞아 선연히 배어든 피 묻은 속적삼
부여잡고 울 수만 없어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떠난 만주 땅

곳곳에 병들고
상처받은 동포들 삶
보살피고 어루만진 따스한 손

왜적 무토부요시를 응징하고
왼손 무명지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혈서 쓰며 부르짖은 조국광복

만리타향 감옥에서 단식으로 숨 거두며
동지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 말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거든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라‘
최후의 한 명까지 남아
조국광복을 기필코 쟁취하라 당부하던 여장부

아!
조선 천지에 이만한 여걸이 어디 또 있으랴!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 1919년 5월 남만주 서간도에 무장독립운동단체 군정부(軍政府).

▲ 비 내리던 날 국립현충원 남자현 애국지사 무덤에서

● 남자현(南慈賢, 1872.12. 7~1933. 8. 22)

19살 때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 김영주에게 시집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 씨는 1896년 여사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니 결혼 6년 만이었다. 남자현은 그때 임신 중이었다.

핏덩어리 아들과 늙으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때를 기다리던 남자현은 46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들어가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만들어 여성계몽에도 힘썼다.

망명 6년째인 1925년에는 채찬·이청산 등과 함께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하기로 결의했으나 실패했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 이규동, 의성단장 편강열, 양기탁·손일민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남자현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통합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안창호 외 47명이 중국경찰에 잡히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이들의 석방에 힘썼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 조사단 「릿톤」경이 하얼빈에 조사차 왔을 때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서 흰 수건에 「韓國獨立願」이란 혈서를 쓰고 자른 손가락을 싸서 조사단에게 보내어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연맹에 호소하였다.

1933년에는 여러 동지와 함께 일본대사관 무토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계획하고 하얼빈에서 중국인 거지 할머니로 변장한 뒤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가 하얼빈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여섯 달 동안 가혹한 형벌 받아오다가 그해 8월부터 단식항쟁을 시작하였고 17일 만에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해 8월 22일 60살을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남자현의 죽음을 두고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했으며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인 <震光, 1934.1월>에는 남 여사의 항일투사 소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보다 앞선 1933년 6월 19일 자 동아일보에는 “전권대사 무토 암살 미수‘라는 제목으로 남 여사의 항일투사 소식을 크게 보도하였다. 유해는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지에 묻혔다가 1967년 7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41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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