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담장 위로 호박순이 소리 없이 기어오르고
하늘은 비를 뿌릴 듯 먹구름 드리웠다
님이 계실 일 없겠지만
동래 칠산동 생가 텅 빈 기와집 안채 뜨락엔
어디선가 때 이른 흰나비 한 마리 날고 있다

임도 나비 되어 고향 땅 찾았을까
툇마루 걸터앉은 나그네 곤륜산 하늘을 더듬는다

부산의 조숙한 문학소녀
경술국치 치욕의 날 자결한 아버지 뒤를 이어
타오르던 항일 투지 끝내 의열단 투신했었지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를 사랑하는
조선의 피 끓는 혁명가와 맺은 언약
신방에 타오르는 촛불 우국의 횃불 삼아
대륙을 휘저으며 일제에 대적하던 여장부

곤륜산 피 튀는 전투에서 마감한 서른네 해 삶
왜적의 총칼에 날개 꺾였으나
나라사랑 마음 생사 따라 변하지 않아
 
조국의 빛 찾던 날 피 묻은 속적삼 가슴에 품고
고향 땅 돌아온 남편 슬픔 삭일 때
긴 가뭄 끝 밀양 감전동 하늘에 때맞춰 내리던 단비
대지에 피처럼 스며들던 불굴의 투지여라.


● 박차정(朴次貞, 1910.5.7~1944. 5.27) 

천궁(天宮)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우리집 뒤에 있는 논 가운데는
뭇 개구리 소리마춰 노래합니다.
내 기억의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 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떠러집니다
미지의 나라로 떠나신 언니
개구리 소리 듣기 좋아 하더니
개구리는 노래 하것만
언니는 이 소리 듣지 못하고 어디갔을까?

  
이 시는 문학소녀 박차정이 동래일신여학교 시절에 교우지 <일신>2집에 실은 ‘개구리소리’로 일찍 죽은 언니를 추모하는 노래이다.
박차정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부모와 오빠인 박문희와 박문호, 숙부 박일형 등의 영향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민족교육의 전통이 강했던 일신여학교 재학 중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고,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27년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한 이래 박차정은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여성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면서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였다. 당시 근우회는 학생운동에도 관여하여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시위 직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석방 후 고문 후유증 치료를 받던 중 중국에 먼저 건너가 의열단에서 활약하던 둘째 오빠의 주선으로 북경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레닌주의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였으며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설을 준비하였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설 때 22명으로 구성된 대본부 부녀복무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박차정이 많은 여성독립가 중에서 부녀 복무단 단장으로 선출된 것은 탁월한 지도력과 따스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 대원 가운데는 여자 대원이 많이 있었는데 박차정은 자상한 언니처럼 대원들을 보살펴 주었다. 여성 대원들은 감자밭을 일구거나 도토리를 주워 가루로 만들어 대원들을 식량 조달에도 힘썼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 낫지 않고 후유증이 도져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34살의 아까운 나이로 중경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해는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송환,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되었다. 부산 금정구에 동상(2001.3)이 세워져 있고, 동래구 칠산동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2005.7)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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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순사들도 무서워 벌벌 떨던 의열단장 남편 김원봉

김원봉(金元鳳,1898.8.13∼1958.11.)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며, 혁명가·정치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위키백과사전에는 ‘김원봉’에 대한 첫 줄을 그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자발적인 월북자라는 이유로 제1공화국이 붕괴한 뒤에도 금기시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연안파가 숙청되고 그의 처당숙인 김두봉이 쿠데타로 실각, 숙청당하면서 그는 금기인물이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 재평가, 재조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와 그의 일대기와 2000년대 이후 훈장 서훈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 선생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인 김원봉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김일성의 처지에서 보면 해방 후 박헌영 등 남로당을 숙청한 후 김원봉은 마지막 남은 라이벌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김원봉을 배제했을 개연성이 크다.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했다.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많은 항일투사가 활동할 당시는 냉전시대가 아니었다. 그 당시 우리 겨레에게 공산주의는 서양에서 들어온 수많은 사조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반공이란 개념도 거의 없었고, 일본과 싸우는 아시아의 두 대국 러시아와 중국이 모두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상당수가 직ㆍ간접적으로 공산주의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ㆍ경제적인 목적에서 반공이념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후대의 관점에서 김원봉이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를 따지며 그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공적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건 상당히 무의미한 논쟁이라는 주장이 있다. 남한과 북한 그 어느 곳에서도 김원봉에 대해 기념하는 어떤 묘소도 기념비도 없는 게 지금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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