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5월 6일 밤 창사 남목청 6호
삐걱거리는 낡은 목조 건물 이층 회의실 
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모여
독립 꿈꾸며 머리 맞대던 그때

탕탕탕타앙... 타..앙...

변절자 이운한이 꺼내 든 권총
슬픈 내 동포 손에 총 맞아
현익철이 절명하고 백범 선생 관통상 입어

사경 헤매는 겨레 스승 부축이며
독립의 날개를 꿰매던 이여

때로는 씩씩한 목소리로 광복군 소식 알려
피 끓는 동포애 북돋우고
때로는 광복진선 청년공작대원 되어
고난 속에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난 이여
 
장강의 물길 따라 떠돌던 임시정부
독립의 선봉자 남편과 광복군 딸 어깨동무하고
더 큰 투지로 임시정부의 횃불 된 이여.


● 연미당(延薇堂,1908.7.15~1981.1.1) 

“연미당, 이복영, 김정숙 등이 안창호 선생 추도회에서 애도가를 불렀으며 추도식장 안은 비분강개한 분위기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는 1938년 6월 30일 <신한민보> 기사로 연미당이 30살 때의 일이다. 일명 충효(忠孝) 미당(美堂)으로 불리며 경기도 여주 출신인 연미당은 이보다 앞서 22살 때인 1930년 8월 중국 상해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이 조직되었을 때 5명의 임시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상해 청년 여자교민에 대한 조사와 상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거사 뒤 일제의 포악한 탄압을 피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32년 4월부터 1936년 5월에 이르는 동안 가흥ㆍ진강을 거쳐 장사(長沙)로 이동할 때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며 도왔고, 장사에 있는 남목청(楠木廳)에서 3당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백범을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員)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고 1943년 2월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어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또한,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를 통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상황을 우리말로 방송하였다.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하여 초모공작을 하면서 한국 여성들의 총궐기를 촉구하며 활동하는 한편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임시정부에서 선전부장과 주석판공비서에 임명되어 광복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엄항섭(嚴恒燮, 1898. 9. 1~1962.7.30)은 그의 남편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한촌이라 불리던 토교의 임시정부 망명 가족들이 머물던 곳 (20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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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미당 남편 엄항섭은 열렬한 독립지사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엄항섭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엄항섭 군은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프랑스)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일본)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 주는 것이었다.” 백범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그림자처럼 동행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사람이 엄항섭 지사이다. 그는 경기 여주 출신으로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여주군 담당의 국내조사원과 법무부 참사(參事) 등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절강성 항주에 있는 지강대학(之江大學)을 졸업한 뒤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비서국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상해청년동맹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에 선정되었으며 경제후원회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한국교민단의 의경대장(義警隊長)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조직의 재무를 맡았으며, 애국단조직에 참여하여 김구의 주도하에 계획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1936년부터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7년 2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였으며, 임정의 결산위원을 담당하였다.

1940년 5월 3당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그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외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0월 11일에는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한국측 이사에 선임되었다. 1944년 5월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및 주석판공비서에 임명되어 광복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광복 후 1945년 11월 백범 김구와 함께 환국하였다. 광복 후 민주의원의 의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6·25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연미당 딸 엄기선도 광복군 길 걸어
 
엄기선 (嚴基善, 1929.1.21~2002.12.9)은 1938년 12월부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전지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戰地工作隊)의 공작대열에 오희옥(吳姬玉)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들은 일본군내의 한국인 병사에 대한 초모공작의 하나로 연극이나 무용 등을 통하여 적국의 정보를 수집 보고하는 한편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우었으며 중국 국민에게 한국인들의 투지를 널리 알렸다. 이때 엄기선은 박영준·이재현·노복선 등의 선배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 뒤 1943년 2월 무렵부터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던 아버지 엄항섭을 도와 중국 측 방송을 통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상황과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렸다. 또한, 중국 토교(土橋)의 깊은 산 계곡에 소재한 수용소를 찾아가 일본군 포로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하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선전공작에 진력하는 등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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