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찬바람 속 광복이 무엇이드냐
변절자의 방화로 심한 화상입고 바위굴 숨어들 때
놀란 박쥐들 퍼덕이며 날아갔었지

어제는 유화현 삼원포 민족교육 겨레 혼 심고
오늘은 눈보라 속 독립군 행진에 앞장선 이여
북녕 철로 산해관 넘어 북만주 땅 찾아가는 길
철통같은 일본군 수비대 따돌리고자
중국인 아낙으로 변장이야 했다지만
품속의 비밀문서 들킬까 통째로 외워버린 지략

만주에서 불호령 치던 유격대 출신 높은 기개
안휘성 부양에서 지하공작 선봉장 되어
열대여섯 어린 독립군 보듬으며
광복군 후예 길러 낸 자상한 맏언니

해방된 조국에서 금의환향 바란 바 없지만
대륙을 호령하던 열혈 독립투사
빛 찾은 고국에서 갈 곳 없어 떠돌다
차디찬 골방에서 숨져갈 줄이야.


● 오광심(吳光心, 1910.3.15~1976.4.7) 

평북 선천 사람으로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학규의 부인이다. “실전 경험이 있더라도 군 지도자가 되려면 군사학을 배워야한다.”라고 주장한 김학규는 1936년 1월 중국 중앙군관학교인 노산학교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그해 12월 남경에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미주의 몇몇 단체들을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을 조직한 사람으로 오광심은 여성의 몸으로 남편과 함께 당당한 한국의 광복군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뛰었다.

유주(류쩌우)지역에서 탄생한 청년공작대는 항일의식고취를 위한 선전, 중국인의 항일의지와 반일감정 고취를 도왔으며 항일의 내용을 담은 벽보, 합창, 연극 등을 통해 독립의지를 북돋았다. 청년공작대는 이듬해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데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음을 보여준 예가 오광심이 속한 한국광복진선의 청년공작대였다. 1938년 11월 결성된 공작대의 총 대원수는 3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3분의 1인 11명이 여자였다.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오광심(1910년생, 30살) : 조선혁명당원 김학규(광복군 제 3지대장 부인)
지복영(1920년생, 20살) : 지청천 장군(광복군 총 사령관) 차녀
오희영(1924년생, 16살) : 오광선 장군 장녀
오희옥(1926년생, 14살) : 오광선 장군 차녀
방순희(1904년생, 36살) : 임정의정원 의원 김관오(광복군) 부인
김병인 : 이준식(광복군 총사령부 제1대장) 부인
김효숙(1915년생, 25살) : 김봉준 장녀, 송면수 부인
신순호(1922년생, 18살) : 신건식 딸
연미당(1908년생, 32살) : 엄항섭 부인
조계림(1925년생, 15살) : 조소앙 딸
이국영(1921년생, 19살) : 민영구 부인
                   
여자대원들은 거의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당원들의 부인과 딸이었으며 1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했다. 이 가운데 오광심은 이미 만주에서 5년간 항일투쟁 경험을 가진 바 있으며 남경에서 추진되던 대일항전을 위한 각 당 통일 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던 보기 드문 실전경험을 가진 역전의 투사이다. 오광심은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 조순옥 등과 함께 여군복을 입고 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하였다. 그 뒤 광복군의 제3지대장인 부군 김학규와 함께 제3지대의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맡아 광복을 위해 뛴 여장부요, 광복군의 맏언니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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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찾아 가는 길    -오광심

1.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2.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3.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을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을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전우 추모가    -김학규(오광심 남편, 조선혁명군 참모장)

1. 언제나 우리 동지 돌아오려나
   애가 달아 기다린 지 해가 넘건만
   찬바람 눈보라 휘날리는 들
   눈물겨운 백골만 널려있구나

2. 서산에 지는 해야 머물러다오
   우리 동지 돌아 올 길 아득해진다
   돌아보니 동지는 간 곳 없고
   원수들의 발굽만 더욱 요란타

3. 아 생각 더욱 깊다 나의 동지야
   네 간곳이 어드메냐 나도 가리다
   보고 싶은 네 얼굴 살아 못 보니
   넋이라도 네 품에 안기려한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막강해진 군사력을 피해 만주벌에서 악전고투하던 한국 독립군들은 활동 근거지를 점차 중국 관내로 이동해야만 했는데 연석회의 결과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와 김원봉의 협조를 구하기 위한 교섭차 김학규를 남경에 파견하기로 했다. 김학규는 1934년 5월 초 참모장직을 사임하고 남경으로 떠났는데 안동-청도-천진-북경을 거쳐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더욱이 초소마다 왜적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오광심은 남편의 안전을 위해 동행하게 되는데 김학규는 농부로 변장하고 오광심은 남루한 농촌부인으로 꾸몄다. 머리는 평안도 식으로 틀어 올리고 흰 수건을 쓰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는 차림 이었다. 당시 남경으로 피신해 있던 임시정부까지 찾아가는 험난한 과정을 오광심은 ‘님 찾아 가는 길’이란 시로 남겼고 조선혁명군 참모장이었던 남편 김학규는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전우 추모가’를 작사·작곡 했다.

이들 부부는 남경까지 200여 쪽의 보고서를 가지고 가던 참이었는데 왜경의 검문검색에 발각되지 않도록 오광심이 이 내용을 몽땅 암기해서 구두로 한자도 틀리지 않고 보고 했다는 이야기는 전설 같기만 하다.
 
그러나 해방 후 오광심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구걸을 해야 할 정도로 어려웠고 남편은 군사재판에 회부 되는 등 이들 부부의 광복 후의 삶은 철저히 파괴된 삶이었다. 젊은 날 조선혁명군으로 또한 한국광복군으로 대륙의 산하를 누비며 빛나는 활동을 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찬란한 청춘을 송두리째 바쳤던 이들의 열정에 대해 해방된 조국은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았다고 박용옥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1), 330쪽’에서 아쉬워했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31)》‘여성운동’, 박용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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