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후공원 낡은 로프웨어에 매달려 산마루를 올랐다
저만치 발아래 류쩌우 시내가 육십 년대 사진첩 속 그림처럼 어리고
그 어딘가 열네 살 소녀의 씩씩한 군가가 들려올 듯하다
 
용인 느리재의 명포수 할아버지 의병장으로 나선 길 뒤이어
만주벌을 쩌렁쩌렁 호령하던 장군 아버지
그 아버지와 나란히 한 열혈 여자 광복군 어머니
그 어머니의 꽃다운 두 딸 희영 희옥 자매
광복진선 청년공작대원되어 항일연극 포스터 붙이러
어봉산 도락암 공원에도 자매는 다녀갔을까?

열네 살 해맑던 독립소녀 팔순 되어 사는 집
수원 대추골 열세 평 복지 아파트 찾아가던 날 
웃자란 아파트 정원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낯선 나그네 반겨 맞이하던 팔순 애국지사

흑백 사진첩 속 서간도 황량한 땅 개척하며 독립의지 불사르던
오씨 집안 3대 만주벌 무용담 자랑도 하련만은
손사래 절레절레 치는 수줍은 여든여섯 광복군 소녀

그 누구 있어 치열한 3대의 독립운동사를 책으로 쓸까
욕심 없이 아버지 유품을 내보이며 들꽃처럼 미소 짓던
해맑은 영혼 그 눈동자에 비치던 우수 어린 한 점 이슬

아직도 광복의 영광 새기지 않는 조국
전설 같은 독립의 이야기 찬란히 다시 꽃피울 때
꿈 많던 용인의 열네 살 광복군 소녀의
서간도 이야기 만천하에 들꽃처럼 피어나리라.

※류후공원: 중국 광서성 유주(류쩌우)에 있는 공원으로 광복진선천년공작대가 활약한 곳이다. 글쓴이는 이곳을 2011년 1월 다녀왔다.

▲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서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추모제전’에 참석한 오희옥 애국지사와 함께 (2011.5.27)

● 오희옥(吳姬玉, 1926. 5. 7~)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오광선(吳光鮮)의 둘째딸이다. 아버지는 처음에 성묵(性?)이란 이름을 썼으나 조선의 광복을 바라는 뜻에서 광선(光鮮)으로 바꿀 정도로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1939년 4월 열네 살 나이로 중국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수집, 일본군 중 한국인 사병에 대한 초모와 연극·무용 등을 통한 대원의 위안사업에 종사하면서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第5支隊)로 편입되었고 1944년까지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오희옥 여사의 집안은 할아버지부터 부모님과 언니 내외 등 일가족 3대가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집안이다.

정부에서는 오희옥 여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열심히 당시를 설명하는 오희옥 애국지사와 함께

<더보기>
 
“보훈의 달을 맞아 생존 독립운동가 오희옥 애국지사를 만나러 수원의 보훈복지타운 아파트에 간 것은 2011년 5월 30일이었습니다. 그 며칠 전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서 있었던 후손 없는 광복군 추모회에서 뵈었던 덕에 아파트 현관문에 나와 서서 글쓴이를 반갑게 맞아주는 올해 86살의 오 애국지사는 광복군 출신답게 정정했습니다. 열세 평 아파트 안방에는 훈장이 자랑스럽게 걸려있고 부군이 돌아가신 후 혼자 깔끔하게 해놓고 사시는 모습이 광복군 부대의 내무반을 보는 듯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거사 후 일제의 압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경에 도착할 때까지 27년의 유랑길에 오르는데 이때 장사(長沙)로 가는 길에 트럭과 목선을 타고 한 달간 양자강을 힘겹게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며 유주에서 언니 오희영과 한국진선청년공작대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이야기, 중경 가까운 토교에서 청화중학교를 다닌 이야기 등은 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는 글쓴이에게는 더욱 실감 나게 들렸습니다. 교통이 좋은 오늘날도 광활한 중국 대륙을 이동하기란 쉽지 않은 터에 100여 명이나 되는 임시정부 가족들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피난 생활을 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오 애국지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놀란 것은 이 집안이 대단한 독립군 집안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의 일념을 품고 의병항쟁 활동을 한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별동대장과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아버지 오광선 장군, 그리고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여 맹활동을 한 어머니 정현숙(다른 이름, 정정산)은 물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한 형부 신송식에 이어 오 애국지사의 언니 오희영 애국지사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광복군 제3지대 대원 등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 언니, 오 애국지사에 이르는 여성들도 당당한 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 애국지사는 광복 후 1954년 수원 매산국민학교에서 실시한 임시교원시험에 합격하여 원삼국민한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래 1991년 서울 홍제동 고은국민학교에서 평교사로 정년퇴임 한 분답게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안타깝게도 3대에 걸친 독립운동사 한 권쯤은 벌써 나왔어야 할 텐데 제대로 조명된 일가족의 독립운동사 하나 없이 낡은 상자 속 흑백 사진만이 그때를 말해주고 있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직은 수원의 보훈 아파트에서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까지 혼자 찾아다닐 만큼 정정하신 오 애국지사는 찾아온 사람이 반갑고 그립다는 듯 인터뷰를 마치고 글쓴이가 보훈아파트를 다 빠져나올 때까지 입구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셨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진 세월을 견뎌내신 애국지사의 무병장수를 새삼 빕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소서! ”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김영조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http://www.koya.kr> 2011. 6. 8. -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