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없는 판에 시험이 다 무엇이냐
백지동맹 앞장서던 겁 없는 열여섯 처녀
광주학생 만세 함성 듣고
피 끓어 떨치고 일어선 종로거리 만세운동

경성 트로이카 열혈 청년 이재유 도와
노동자 권리 찾다 고등계형사에 잡혀
갖은 고초 당했어도 의연한 자세
죽음을 불사한 민족차별 철폐 운동 후회는 없어

폐병 견뎌가며 쟁취한 해방 된 이 땅에서 
안락을 구걸한 적 없다마는
사회주의 남편 빨갱이로 몰려 숨죽여 살던 삶

어린 삼남매 부여잡고
떠돌던 시절을 더는 묻지 말라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홀로 추슬러
마산 딸네 집 허름한 뜨락의
이름 없는 들꽃을 사랑하다
두 권 시집 남기고 홀연히 떠난 자리
오늘도 목백일홍 저 혼자 외롭게 피어있네.


*경성 트로이카: 1933년 서울에서 조직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주도한 이현상, 이재유, 김삼룡을 주축으로 한 단체로 이효정, 이경선, 박진홍 등 여성들도 활동하였다. 경성 트로이카는 반제국주의 운동, 학생 운동, 노동조합 운동, 독서회, 농민 운동을 전개했으며 1934년 1월 대부분 활동가가 체포되었는데 이백오십여 명의 구속자들이 발생하였다.

▲ 여든을 넘긴 어느 날 마산의 문학인들과 나들이 간 개나리 핀 뜰에서 고운 자태의 이효정 애국지사. 사진=박진수 제공

● 이효정(李孝貞, 李春植, 1913.7.28~2010.8.14)

1930년대 초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만세를 부르다가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또한,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적[鐘紡]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이효정은 이재유의 지도를 받아 여직공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노동쟁의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의 확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파업을 선동하였던 것이다. 종방 파업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 이효정은 서울에서 이재유·권우성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이 월북하고 2남 1녀와 함께 남한에 남은 이효정은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요시찰인물이 된 그는 수시로 사찰기관에 연행돼 고문과 취조를 당하게 된다. 영장 없이 끌려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고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으면서 억울한 옥살이도 감수해야 했다. 1980년대 '6.10 민주항쟁'으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자 이효정에 대한 사찰도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족이 겪은 말 못할 가슴의 한은 치유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이병희 애국지사의 친정 집안 조카인 이효정 애국지사는 칠순이 넘어서 시 창작에 몰두하며 시름을 달랬는데 <회상>, <여든을 살면서> 라는 두 권의 시집을 남기고 97살의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더보기>

나의 동산에서
                                  이효정

양지바른 곳에 땅이 좀 있으면
조그만 동산을 만들고 싶다
빙 둘러 참꽃과 철쭉을 심고
한 가운데는 어머님의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
대문 밖 키는 은행나무를 베어
어머니 기리는 절절한 마음
노래로 그려 새겨 놓고
그 노래 읊조리는 고운 새들도 그려놓고
작은 연못을 파서 사철 고기떼가 놀게 하고
동그란 파문에 감도는 어머님의
옛 이야기 꽃피우고 싶다

참꽃 필 무렵이면
파릇파릇 햇쑥이 돋고
철쭉나무 사이사이에
파아란 들나물로 자라나겠지
씀바귀 꽃다지 벌그두데기 냉이 달래랑
돌미나리 미역취 반도나물
어머니 즐기시던 햇나물 햇쑥
그 때는 어머니 만날 수 있겠지
그리도 즐기시던 쑥버무리 쑥절편
소담하게 담아 놓고
싸근한 들나물 무쳐 보리상반 밥에
달큰한 고추장 곁들여 비빈 밥
어머니와 도란도란 먹어 보고 싶다.
(후략)                
-시집 ‘회상’에서

“77세 할머니의 소녀 같은 감성이 빚은 정갈한 시정(詩情)!”이라고 이효정 여사의 첫 시집 ‘회상’ 표지에 적혀 있는 글귀가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효정 여사의 자료를 찾다가 ‘회상’과 ‘여든을 살면서’라는 시집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는 정보를 얻고 부랴부랴 시집을 낸 출판사로 연락을 해보니 이효정 여사의 아드님 연락처를 가르쳐 준다. 곧바로 가르쳐준 전화를 걸자마자 아드님 되시는 박진수 화백님께서 인천에서 광화문 사무실로 한걸음에 달려 나오셨다. 굵은 장맛비에 바깥나들이가 귀찮을 법도 하건만 박 화백님은 기쁜 얼굴로 두 시집을 합본한 “일흔에서 여든을 살면서”를 살며시 책상 위에 꺼내 놓으신다. 

항일독립운동 하신 분에 대한 글을 쓰는 작업도 쉽지 않지만 생전의 사진 한 장을 구하기는 더욱 어렵다. 일제강점기의 풍찬노숙 시절에 변변한 사진을 찍어 놓은 분이 몇 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사진을 가지고 있더라도 후손들이 박 화백님처럼 단걸음에 갖다 주시는 분은 없다. 6하 원칙을 물으며 사진의 용도를 묻는 후손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미심쩍어 선뜻 사진 한 장 주기를 꺼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 못된 사람이 후손을 서글프게 했나 싶어 가슴이 아프다.

“(전략) 달 포 째 병시중에 지친 모습 / 아니 삶에 부대낀 인생의 모습 / 통증으로 추스르기 힘든 나를 업고 / 병원 층계를 오르내리던 가쁜 숨결 / 날카로운 비수로 깊숙이 가슴 밑을 도려낸다 / 아직도 펄펄한 청년인줄 알았는데”

두 번째 시집 ‘여든을 살면서’에 아드님을 묘사한 듯한 “아직도 청년인줄 알았는데” 속에 비친 아드님의 효성이 수채화 같다. 병환 중의 어머니를 업고 뛰어다닌 것처럼 어머님의 시집을 필요로 한다는 사람의 전화 한 통만을 받고 “낯선 손님을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시집을 들고 빗속을 뛰어나오신 칠순의 아드님 박진수 화백 모습은 이미 어머니 이효정 여사에게 있던 모습이다. 그 기록은 소설가 안재성 씨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1930년대 경성에서 일제의 착취에 저항하며 궁극적인 독립을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경성 트로이카》를 쓴 작가 안재성 씨는 이효정 할머니를 직접 만나본 느낌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상대방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 속에 사려 깊음과 총명함이 서려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목숨을 내걸고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듦으로써 완전한 순결을 얻은 그녀의 영혼은 해방과 전쟁의 혼란 그리고 이후의 빈곤과 치욕에도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다. 낮선 손님을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지나치게 환대하거나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부드러이 웃어 줄 수 있는 기품 속에서 수십 년 동안 화제대상으로 올리는 것조차 금지 되었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거리낌 없는 이야기를 해주는 용기 속에서 한 세기를 살아 온 완성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

 -《경성트로이카:1930년대 경성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안재성, 사회평론사,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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