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안개 젖히고
대륙의 젖줄 장강 따라 흘러든 곳
계림 동령가 칠성공원 푸르른 숲 속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지만
칠십여 년 전 이곳은
항일기치 높이 들고 분연히 일어난 조선의용대
피 끓는 동포들 모여들던 곳

열여섯 꽃다운 처녀 독립군 되어
시퍼런 일본군 정보 캐러 다니며 넘나들던
계림의 구중 계곡 골짜기
휘몰아치던 중원의 흙바람 먼지 일며
조여 오던 일본군 총칼 앞에 결코 굽히지 않아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힘찬 압록강 행진곡 목 터져라 부르며
다잡은 광복의 투지 그 선봉장 되신 이여

왜놈들 두려워 벌벌 떨던 의열단 청년 만나 맺은 가약 
혼수도 신혼 꿈도 모두 바쳐 되찾은 조국 땅에서
장가계 원가계 계림의 산수구경 가는 사람들아
뾰족뾰족 솟은 기암괴석 올려다볼 때 
골짜기 굽이마다 광복군 심은 얼 잊지 마시게.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조선항일의용군(朝鮮抗日義勇隊) 혹은 국제여단(國際旅團)이라고도 불렸으며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정부의 통일된 후원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다.


● 전월순(全月順, 全月善 1923.2.6~2009.5.25)  
 

▲ 사랑스런 손자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전월순 애국지사. 사진제공=김원웅
경북 상주(尙州) 사람으로 1939년 9월 중국 귀주성(貴州省) 계림(桂林)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입대하여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병사초모 등의 공작활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4월 20일 개최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8차 국무회의의 결의에 따라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뒤 1942년 4월 20일부터 1945년 8월 14일에 이르는 기간에 광복군 제1지대(第一支隊)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한편, 백범 김구의 소개로 광복군인 김근수(金根洙, 金石, 王碩)와 결혼하여 부부가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남편은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산서, 화북지구에서 지하공작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전월순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부부독립지사인 전월순·김근수의 큰아들인 김원웅(金元雄)씨는 제14·16·17대 국회의원을 지낸 3선 의원이며,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장”으로 약탈된 문화재 환수를 위해 힘썼다. 특히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서 부모님의 애국독립 정신을 실천한 보기 드문 전력의 국회의원으로 알려졌다.
          
<더보기> 부부 독립지사 전월순·김근수

전월순 여사의 남편 김근수(金根洙 1912. 9.27~1992.1.30) 애국지사는 1935년 중국 남경에서 조선의열단에 입단한 뒤 화북지역 연락책을 맡았고, 1939년 조선의용대 선전공작부장으로 낙양방송국을 통해 국내 동포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등 8·15해방 전까지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정부에서는 김근수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당시 김근수 지사가 속했던 조선의열단은 어떠한 곳인가를 잠시 살펴보자.

“속된 말로 일제군경은 의열단이라는 말만 들어도 오줌을 저릴 정도로 무서워했다. 오죽했으면 사기꾼이 잡혀 와서 ‘나는 의열단원이다’라고 하면 일본순사가 혼비백산하곤 했다. 의열단은 1920-30년대 수많은 민족운동 단체 가운데 임시정부를 제외하고 활동기간이 가장 길었던 단체이다. 일제 식민지배를 전면 거부하면서 그 투쟁을 시기별로 독특한 운동노선과 행동모델을 구축하였다. 의열투쟁은 곧 테러투쟁으로 정규 군사조직을 갖추고 무력항쟁을 주도하였으며 민중의 총 봉기를 주도하였다. 의열단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독립운동 단체로 한국인들이 가장 통쾌하게 여긴 의열 투쟁 단체이다.”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시대의창,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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