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의 물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사람들
강물 위에 배 띄워 노래하지만
물의 근원을 캐는 사람은 없다

혈혈단신 여자의 몸
압록강 너머 빼앗긴 조국 땅 오가며
군자금 나르던 가냘픈 새댁
그가 흘린 눈물 장강을 채우고 넘친다

돌부리에 채이면서
몇 번인가 죽을 고비 맞으며
수십 성상 국경 넘나든 세월
거친 주름 되어 골마다 패어있다

바닥난 뒤주 긁어
배고픈 독립투사 다독이며
가난한 임시정부 살림 살던 나날
훈장 타려 했었겠나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뛰어온 구국의 일념
압록의 푸른 물 너는 기억하겠지.


● 정정화(鄭靖和, 1900.8.3~1991.11.2)

“26년이라는 전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는 임시정부와 같이 살았다. 백범의 말대로 거지나 다름없는 상해 시절 어느 때는 이동녕, 차리석, 이시영 같은 분들과 시장 뒷골목에서 동전 한 닢짜리 중국 국수 찌꺼기를 달게 사먹기도 했고 등 뒤로 왜놈의 기관총 쏘는 소리를 들으며 임정의 피난 짐보퉁이를 싸기도 했다. 이동녕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볼 때나 백범 부인 최준례 여사의 식어가는 손을 보듬어 쥐었을 때는 마치 암담한 조국의 꺼져 가는 숨결이 내게 와 닿는 듯했고 하늘을 깨뜨릴 것 같은 드높은 사기로 무장된 청년 광복군들이 이국의 하늘 밑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는 당장 내일이라도 독립된 조국을 품에 안을 듯싶었다.” 자서전 ‘장강일기’에서 정정화 여사는 그렇게 임시정부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충남 연기(燕岐) 출신으로 시아버지인 대동단(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따라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간 정정화는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하여 6회에 걸쳐서 국내를 왕복하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왜경의 감시가 심한 압록강을 넘나들며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임무를 훌륭히 해내었다.

지금으로 치면 코흘리개 소녀인 11살짜리 어린 신부 정정화는 개화파 집안의 며느리가 되면서부터 세상물정에 눈을 떠갔다. 그의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은 명문가 안동 김씨 출신이나 서출로 어려움을 겪다가 서출 출신으로는 조선왕조 오백 년 사상 처음으로 종일품의 직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서예가 출중하여 ‘독립문’과 안동의 ‘봉정사’ 등 전국의 이름 있는 편액 상당수가 시아버지 김가진의 글씨이다. 동갑내기 남편 김의한은 3·1만세운동 후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이 여의치 않자 시아버지와 상해로 망명하고 말았는데 정정화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국내 신문을 보고서야 망명 사실을 알았다. 그만큼 국내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1932년에는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동녕, 김구, 엄항섭 등과 함께 이동하면서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았다.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의 창당요원, 한국혁명여성동맹,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 등 독립운동의 길이라면 안살림이든 바깥일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지금은 헐리어 재개발 중인 치장의 타만강변에서 글쓴이. 이곳 언저리에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고 숱한 임시정부 식구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2011.1.10)

<더보기> 독립운동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담담하게 그린 ‘장강일기’의 주인공

아직껏 고생 남아 옥에 갇힌 몸되니
늙은 몸 쇠약하여 목숨 겨우 붙었구나
혁명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
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
국토는 두 쪽 나고 사상은 갈렸으니
옥과 돌이 서로 섞여 제가 옳다 나서는구나
철창과 마룻바닥 햇빛 한 점 없는데
음산한 공기 스며들어 악취를 뿜어내는구나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위해 뛰다 돌아온 독립운동가. 그러나 이들을 맞이한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었다. 쉰 살 되던 해인 1950년 9월 남편이 납북되면서 난데없는 ‘요시찰 인물’로 찍혀 감옥에 갇힌 정정화 애국지사는 서러운 조국의 냉대에 몸부림쳐야 했다. 살신성인으로 쟁취한 조국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고 당장 끼니를 잇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자 생계를 위해 보따리장수로 나섰다. 이것저것 일자리를 구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보따리에 헌옷을 주워 모아 머리에 이고 팔러 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장사소질이 없던 그는 시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지만 신통치 않아 갖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머니는 원대한 이상을 가진 바도 없고 큰 포부를 지닌 것도 아니었다.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갈망하는 독립을 바랐을 뿐이며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해냈을뿐이다’ 평생 올곧은 삶을 살다 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은 ‘장강일기’에서 어머니의 삶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을 어머니로 꼽았다. 틈날 때마다 책을 손에 놓지 않던 정정화 애국지사의 독서는 변절자와 매국노가 판치는 세상에서 자기 철학을 갖고 흔들림 없이 꼿꼿이 살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장강일기》는 정정화 애국지사가 대한협회장을 지낸 시아버님 동농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중국으로 따라나서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일대기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아 당찬 독립군의 기록이요, 한편으로는 숱한 애국지사의 인간적인 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생생한 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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