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 온 지 달포가 넘어, 아쉽지만 서울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올라가는 길에도 명산과 유적지를 빼놓지 않고 두루 둘러보았다.

나라안 구석구석 빼어난 경치를 간직하고 있었다.

박지원이 백동수를 돌아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사람들이 평생 보지 못할 빼어난 경치를 우리 두 사람만 보게 되었네 그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박지원은 오르는 산의 넓은 바위마다 '김홍연'이라는 이름이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는 백동수를 불러 세웠다.

"내가 몇 해 전에 금강산에 올랐을 때도 '김홍연'이란 이름이 바위에 새겨진 것을 보았네. 도대체 이자는 어떤사람인가?"

백동수는 박지원이 흥분하는 까닭을 이해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푸른 절벽에 이름을 새겨놓아 홍ㅊ취를 깨뜨리는 행위를 그 역시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덕무도 "푸른산의 흰 돌이 죄 없이 묵형을 받았네"라며 몰지각한 양반들의 행위를 개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박지원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김홍연이 자신의 벗이란 사실이 곤혹스러웠다.

벗이 없는 자리에서 벗을 욕하는 짓은 스스로 삼가던 그였지만, 박지원의 재촉에 못 이겨 김홍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홍연은 왈짜의 한 부류일세. 그러나 민간에서 부랑 방탕한 생활을 하는, 세속에 물든 무뢰배는 아니네."

"그렇다면 협객이란 말인가?"

"그렇다네. 그는 협객이자 검사였다네."

백동수는 은근히 김홍연이 막된 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젊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해서 무과에 급제했네. 맨 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을 만큼 힘이 셌는데, 젊었을 적에는 양쪽 겨드랑이에 두 기생을 끼고 몇 길 되는 담벼락을 뛰어넘었던 적도 있었다고 들었네.

집을 드나들때도 늘 준마를 타고 좌우 어깨엔 매를 데리고 다녔지."

"무과에 급제했으면 벼슬은 살았는가?"

"아닐세. 그는 벼슬길에 나가기를 즐겨 하지 않았네."

"벼슬을 살지 않아도 될 만큼 집이 부자였던 게 아닌가?"

"맞는 말씀이네. 그는 오히려 재물을 흙을 퍼다 쓰듯이 하여 고금의 유명한 글씨와 그림, 칼, 거문고, 골동품은 물론이고 기이한 꽃과 풀도 사서 모았네.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면 아무리 많은 돈도 아끼지 않았지."

"그래, 그 사람은 지금 무얼 하는가?"

"지금은 머리털이 허옇게 센 늙은이가 되어서 송곳과 끌을 행낭에 넣고 명산을 두루 유람한다는 소문을 들었네.

한라산에 한 차례 들어갔고 백두산에 두 번 올랐다고 하는데, 가는 곳마다 바위에 제 이름을 손수 새기고 다닌다고 하더군."

"무슨 까닭에서인가?"

"나도 궁금하여 물었더니 '후세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겠노라' 했네."

잠시 묵묵히 있던 박지원이 불쑥 되물었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백동수는 다시 대답했다.

"김홍연일세."

"소위 김홍연이란 누구인가?"

"자를 대심이라하네."

"대심이란 누구인가?"

"스스로 호를 발승암(머리 기른 중)이라 부르고 있네."

"소위 발승암이란 누구인가?"

백동수는 어이가 없어 박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박지원은 껄껄 웃더니 말을 이었다.

"옛적에 사마상여가 가공 인물인 무시공과 오유 선생을 내세워 서로 문답케 했다더니, 지금 자네와 나도 태고적 석벽과 흐르는 물 사이에 우연히 만나 서로 묻고 답했구려.

후일 생각해보면 우리들 자신마저도 모두 오유 선생이 될 터인데 소위 발승암이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백동수는 참지 못하고 화를 벌컥 내며 쏘아붙였다.

"내가 어찌 자네에게 황당한 이야기로 거짓말을 꾸며대겠나.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일세."

그는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나갔다.

박지원이 껄껄 웃으며 뒤를 쫓았다.

"그대는 고집이 너무 세구려. 화를 풀고 내 이야기를 마저 듣게나.

옛적에 왕안석이 '극진미신'이라는 글은 곡자운이 지은 것이고 양자운은 아니다고 변론했으나 소식은 '서경에 과연 양자운이란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무릇 두 사람의 문장은 당시 세상에 밝게 빛났고 역사 기록에도 전해오는 실존 인물일세.

허나, 후세에 논변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런 의심을 했네.

하물며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에 새겨놓은 부질없는 이름쯤이야 바람에 사라지고 빗물에 닳아, 백년이 못되어 마멸될 것 아니겠는가?"

그제야 백동수는 박지원이 자기를 놀리는 말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김홍연의 행위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빗댄 말이었다.

박지원의 화법은 하도 특이해서 오래 사귄 백동수조차도 그 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결국 백동수는 한바탕 껄껄 웃고 말았다.

이로부터 9년 뒤, 박지원은 김홍연을 직접 만나게 된다.

박지원이 홍국영의 탄압을 피해 연암에 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박지원이 평양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김홍연과 마주쳤다.

그후 김홍연은 박지원의 집을 찾아가 "그대의 글을 빌려 후세에 이름이나 전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지원은 백동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가 '발승암기'를 지어주었다.

김흥연은 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머리 기른 중'이라 자처하며 살았다.

이는 당대의 검객들 가운데 도가나 불교에 심취한 인물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런 까닭에 검객들의 존재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검객들 대부분이 자신의 존재를 감추며 살았던 것에 견주어 김홍연은 자신을 후세에 알리려고 애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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