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4월 30일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은 이선경. 그는 스무 살도 채 살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야했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그는 자신의 여린 몸을 바친 것이다.

이선경은 집안이 수원에서 큰 부잣집이었던 덕에 수원 산루리에서 서울까지 통학했다.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한 이선경은 1917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했다.

10대 소녀는 또래 친구들과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하고 독립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선경은 당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이었던 임순남, 최문순과 더불어 수원에 거주하면서 서울로 통학하면서 선배들과 조국의 독립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선경은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의 요람이었던 수원교회의 교사로 활동했고 더불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당시 수원 청년운동의 주요한 인물이었던 김노적, 박선태 등과 같은 산루리 출신이었던 이선경은 김세환 밑에서 각지의 연락임무를 담당했다.

그는 치마 속에 혹은 앞가슴에 비밀문서를 넣어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대전, 청주, 안성 등지로 수십 차례에 걸쳐 비밀지령을 전달했다.

김세환과 김노적 아래에서 만세운동의 행동대로 활약했던 이선경은 박선태와 더불어 독립운동 활동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다.

3·1운동 이후 이선경은 임순남, 최문순과 함께 박선태, 이득수를 1920년 6월 7일 수원면 서호(西湖) 부근에서 만나 혈복단(血復團)을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는 논의에 참여했다.

이후 6월 20일 구국민단의 조직을 개편하게 되었는데, 이에 단장 박선태, 부단장 이득수, 서무부장 임순남, 재무부장 최문순, 교제부장 차인재, 이선경은 구제부장을 맡았다.

특히 구국민단은 1920년 7월까지 1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에 있는 삼일학교(현 매향여고)에서 회합해 독립신문의 배포 등을 논의하고, 동시에 상해로 가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세했다.

이에 이선경을 비롯한 여학생 3명은 상해 임시정부 적십자회에 들어가 간호원이 되어 후일 독립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그 힘을 다하고자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이렇게 활발하게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이선경은 체포됐다.

이선경의 체포 당시 심문과정을 보면 그녀의 애국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언제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생각을 가졌는가?"

"어른들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들었으니 태어났을 때부터요"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정의의 길이라 생각하오"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

"그렇소. 석방돼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1921년 4월 박선태와 이득수는 징역 2년을 언도받았고, 이선경을 비롯한 여학생은 징역 1년, 집행유예3년을 선도받았다.

이에 구류 8개월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이선경은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석방돼 집으로 옮겨지자마자 1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도움말 : 수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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