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
일제에 아부하면 환영받았을 몸
박차고
스스로 가시밭길 내디딘 운명
폐교 위기 진명 여학교 맡아
머리에 돌이고 져 나르며 가꾼 억척 교장 선생님

여자도 배워야 산다
일본말을 배워야 원수를 갚는다
나라 있고 내가 있다
심은 민족혼

만주벌 관전현 맹산 독립단 키워
몸으로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뛰어든 항일

별조차 숨어 버린 살 에이는 서간도의 밤
살아 이름 구걸치 않고
죽어 이름을 남기리라 각오한 길

살쾡이처럼 서슬 퍼런 왜놈 순사도
두려워 떨던 대륙을 포효하던 암사자
조 신 성
이름 석 자를 두고
남아의 기상을 묻는 이 그 누구더냐.


※ 육혈포(六穴砲): 탄알을 재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

▲ 여성의 몸으로 손수 돌을 머리에 이고 날라 학교 담장을 쌓았고 그런 투철한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한 조신성 애국지사.

● 조신성(趙信聖, 1873 ~1953.5.5) 

1934년 9월 20일 가을바람 잔잔하게 불던 날 구름 한 점 없는 평양 모란봉 앞 대동강변에서는 조신성의 회갑연이 열렸다. 회갑연 자리에는 만국기가 펄럭였고 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선생은 선지자요, 신진자요, 선각자이십니다. 남이 모를 때 아셨고, 남이 누었을 때 선생은 이미 일어 나셨고 남이 앉았을 때 걸으셨고 남이 쉬었을 때 준비하셨던 분입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게 우리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신 선생의 회갑을 축하드립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축하객이 낭독한 축사는 조신성의 지나온 삶을 잘 말해준다.

조신성은 평북 의주(義州) 사람으로 평양에서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에 전념하였으나 3·1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사임하였다. 1920년에 김봉규·방임주·안국정 등과 함께 평남 맹산(孟山)에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단원이 수십 명에 달하였으며 맹산·영원·덕천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사상 고취, 군자금 모집, 부일분자 응징, 관공서 파괴, 관공리 처단 등 직접투쟁을 펴나갔다. 그러던 중 1920년 11월 왜경에 잡혀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8년 1월 30일 박현숙·박승일 등과 함께 좌·우익 여성단체의 통일적 기관인 근우회(槿友會)의 평양지회를 조직하고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1930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이 단체를 이끌었다.

그러나 조신성의 초기는 불행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모와 함께 살던 16살에 결혼하였지만 6년 만에 남편이 죽어 22살에 청상과부가 된다. 하지만, 과부에 대해 우호적으로 대하는 기독교에 입문하여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귀중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으며 자신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깊은 인식을 하게 했으며, 나아가 민족과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평양에 살던 조신성은 24살 되던 해에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뒤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34살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평양의 진명여학교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에 헌신하게 된다. 이후 만주로 망명길에 올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1934년 <신가정>의 한 기자가 “직접 운동을 실행하시는 동안에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하고(…)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서는 격투하거나, 오도 가도 못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었다.”라고 대답한 것에서 조신성의 맹렬한 독립운동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강철부인이라 불리던 조신성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동암 차리석 선생과도 두터운 교분을 나누던 사이였다. 진명여학교 시절 조신성은 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다이도오고오가 고오리마시다(대동강이 얼었습니다)라고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는 일본어를 가르칠 때마다 일본말을 잘 배워야 그놈의 나라 문명을 빼앗아 원수를 갚지 않겠느냐고 교탁을 채찍으로 두드렸다. 그의 복장은 검소하여 솜을 두르면 겨울옷이 되고 솜을 빼면 춘추복이 되는 회색 산동주 치마저고리를 부지런히 빨아 입었다. 그리고 날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바구니를 들고나가 돌을 주워 담아 머리로 이고 와 학교 담장을 쌓았다고 한다. 이렇듯 열성으로 생활한 그의 노력으로 진명여학교는 수많은 여성 인사들을 배출하는 명문학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 장석흥, 역사공간, 146쪽 -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