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으로 삶을 마감한 아들
주검을 확인하는
어미의 가슴 속에 구멍 하나 뻥 뚫렸다

휑하니 불어오던
그 겨울의 모진 바람 한 자락
뚫린 가슴을 휘젓는다

밥이나 배불리 먹였더라면
공부나 원 없이 시켰더라면
죄인 된 어미의 몸뚱이는 
이미 시체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 목숨 떨궈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조선인의 투지를 보였으니
너의 죽음이 어찌 헛되랴

이제 눈물을 거두고
의로운 너의 혼에
장한 훈장을 다노라.


▲ 어머니 김점순여사와 김상옥 부인의 한식 성묘 기사(1923.3.15 동아일보)
● 김점순(金点順,金姓女, 1861.4.28-1941.4.30)  

동대문 밖 지금 떡전교는 철거 되었지만 떡전거리 근처는 야산으로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이름하여 ‘이문안 공동묘지’였다. 이곳에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으로 순국한 김상옥의 처와 아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를 만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기자는 한식인 이날 취재차 공동묘지를 찾아가는데 무덤 사이를 지나다가 나무비석에 원적은 경성부 ××이고 주소는 상해법조계(上海法租界愛仁里)라고 쓰여 있는 비석 앞에 발을 멈추고 김상옥 처에게 이것이 부군 묘냐? 고 물으려고 보니 김순경지묘‘金淳慶之墓’라고 되어 있어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김상옥 처는 ‘남편과 독립운동 하던 분으로 죽어서도 상해가서 독립운동 하도록 상해주소를 써달라는 유언을 했다.’라며 바로 그 옆에 아무런 비석도 없는 남편의 묘를 가리켰다. 남편이 순국하고 어린 자식들을 보살피느라 묘비도 못 세우고 찾아오지도 못했다며 부인과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삼형제 아들이 모두 죽어 이제 며느리들이 독신이 되었다. 큰아들은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상옥은 객지로만 다니다가 밥 한 그릇 못해 먹이고...왜 왔드냐? 왜 왔드냐? 거기(상해)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이라며 고부간은 슬픔에 겨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떨친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어머니인 김점순 여사는 아들의 의열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게 도운 애국지사이다. 어릴 때부터 석전 놀이(석전‘石戰’은 고구려 때부터 하던 놀이로 차전놀이 등과 함께 조선에서 하던 놀이)를 즐기던 아들이 다칠까 늘 염려되었으나 이것이 폭탄 투척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일이다.

1919년 11월 무렵 김상옥이 서울에서 암살단(暗殺團)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잡히자 인쇄용 등사판을 파괴하여 증거를 없앴으며 1921년 김상옥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때 일경에 탐지되자 김상옥을 피신시키고 대신에 전 가족과 함께 구금되어 고초를 치렀다.

1923년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의거를 결행할 때 거사에 필요한 권총을 감춰주고 또한 무기를 전달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거를 지원하여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을 가능케 하였다. 이 때문에 왜경에 잡혀 무수한 고초를 겪었지만 아들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습으로 꿋꿋함을 보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진 아들 김상옥(1890.1.5-1923.1.22)

“그 애가 자랄 때 온갖 고생을 했어요. 옷 한 가지 변변한 것을 못 얻어 입히고 밥 한술도 제대로 못 먹였으며 메밀찌꺼기와 엿밥으로 살았지요. 어려서 공부가 하고 싶어 “어머니 나를 삼 년만 공부시켜 주세요” 하던 것을 목구멍이 원수라 그 원을 못 풀어 주었습니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는데 시간이 급하여 방에도 못 들어가고 마루에서 한 숟갈 떠먹고 갈 때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 아들의 주검 앞에서 흐느끼는 어미의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하랴.

그런 아들은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싹 틔우게 되고 급기야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최일선에 서서 그간의 소극적인 방법을 달리하여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을 모색하다가 동지들을 모아 암살단을 조직하게 되는데 혁신단(革新團)이 그것이다.

암살단은 김상옥을 중심으로 윤익중, 신화수, 김동순, 서병철 등으로 이들은 독립자금모집과 무기수송, 관공서 폭탄 투척 등을 계획한다. 이들의 주된 표적은 일제 총독과 고관을 비롯하여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이 계획의 효과적으로 해내려고 대한 광복회의 양제안, 우재룡 등의 동지와 적극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무력투쟁을 펼쳤으나 1차 목표로 전라도 등지의 친일파 척결을 위해 일본경찰이나 악명 높은 헌병대 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1920년 8월 2일 미국의원단이 동양각국을 시찰하는 날을 잡아 이들을 영접하러 나간 일제 총독과 고관 등을 처단하기 위해 직접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이동휘, 이시영, 안호 등과 협의한 끝에 권총 40정, 탄환 300여 발을 가져와 이들 시찰단의 조선 방문 때 거사를 도모했다. 미국 시찰단은 여행 목적이 관광이었지만 이때는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일제가 대륙침략을 추진하던 때로 미국의 아시아 극동정책 특히 만주를 포함한 소련과 일본과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식민지 한국인의 처지에서 미의원단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인식시키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게 함과 동시에 세계여론에 호소하려는 게 그 목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제2의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일으키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나 미국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 일부 동지들이 잡혀가는 바람에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김상옥은 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오복영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척결과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일제는 정예기마대와 무장경관 1,000여 명을 풀어 김상옥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삼엄한 수색 끝에 포위된 김상옥은 그들과 대치하면서 몸에 지닌 권총으로 구리다(慄田)외 일본경찰 15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마지막 남은 한 방으로 순절하였으니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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