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에 도도히 흐르는 물결 거스름 없이
기강 토교 중경 발길 닿아 머무르는 곳
따스한 봄바람 되어 이웃을 감싸주던 님

조국을 되찾는 일에
쟁쟁한 독립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단상에 서서 독립을 염원하던 그 자태
그 씩씩함
겨레의 든든한 맏누님 되신 이여!

어루만진 동포의 쓰라린 가슴이 몇몇이며
따뜻하게 감싸주던 고독한 독립투사
또 몇몇이랴

사나이 태어나 이루지 못할 대업
여장부 몸으로 당당히 살아낸 세월
그 늠름하고 당찬 모습
조국이여
오래도록 잊지 마소서.


● 방순희(方順熙, 方順伊, 1904.1.30-1979.5.4)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라면 오늘날의 국회의원이다. 그것도 임시정부 하에서의 의정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1940년 9월 중경 이전 당시 임시의정원의 전열을 가다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래 표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김구를 포함한 국무위원 10인(이시영·조성환·유동열·송병조·홍진·조완구·차이석·조소앙·이청천)이 전부 의정원 의원을 겸하였다는 것은 임시정부의 인물난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의정원법에 의한 의정원 의원 수는 경기·충청·황해·평안·함경·경상·전라·강원 8도의 42명과 중령(中領)·아령(俄領)·미령(美領)의 15명, 합 57명이었는데 위 표에서 보듯 재적 의원 수가 30명에 지나지 못했으니 의원 구성원들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그러한 인물난 가운데 방순희 애국지사는 당당히 여성의원으로 꺼져가는 임시정부의 불꽃 역할을 다했으니 어찌 장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랴.

방순희 애국지사는 국운이 기울어 가던 190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일찍이 경성으로 상경하여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입학하였다. 정신여학교는 당시에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주권의식과 애국사상을 가르쳤는데 북장로교에서 운영하던 학교로 교사와 학생 모두 열렬한 애국투사들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면서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애국부인회를 조직했으며 대한적십자 경성지부를 조직하여 왜경의 감시를 받을 만큼 활약이 두드러졌다.

열여섯 살 되던 1919년 3·1독립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의 삼엄한 감시 탓에 상해로 망명했는데 때마침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서 이를 뒷받침할 여성 단체가 필요하였다. 재정형편이 열악한 임시정부를 돕는 일은 남녀를 불문하는 일이었지만 특히 여성들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을 조직하여 회비 징수와 군자금 모집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이들은 독립전쟁요원들을 지원하고 국민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방 애국지사는 당시 보성중학 졸업반일 때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왜경에 고문을 당하다 1921년 상해로 망명한 우당 김관오 애국지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김관오 애국지사 역시 투철한 독립투사 동지로서 함께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눠 독립의지를 불태운 방 애국지사의 주요공적을 보면 1938년 8월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 1942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경구당부 간사, 1942년 10월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 1943년 6월에는 한국임시정부 선전부장, 194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 연락원으로 뽑혀 선발대로 귀국하게 될 때까지 굵직굵직한 일들을 도맡아 조국광복의 초석 역할을 톡톡히 한 여장부의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회장 방순희 여사(1940.6.17) <사진=오희옥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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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방씨 가운데 특별히 기억해야 할 애국지사 “방한민”
-“왜놈”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던 혈기 넘치는 기자 -

방순희 애국지사는 온양 방(溫陽方) 씨이다. 온양 방씨 문중에 꼭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로 방한민(方漢旻,1900.1.16~1968.2.9) 애국지사가 있다. 방한민 애국지사는 방순희 애국지사보다 4년 이른 1900년 1월 16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던 방한민 선생은 당시에 수재들이 들어가는 공주농학교에 15살에 입학하여 3년을 마치고 잠사업종 제조방법을 농민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 뒤 1920년 조선일보 창간직원 가운데 한 사람인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독립운동 소식과 일제 친일파들의 만행 등을 보도하면서 ‘왜놈’이라는 용어를 서슴없이 기사에 썼으며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恨’이라는 기사를 연재하는 등 조선민중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쓰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해고당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도 올곧은 글로 민족정기를 함양하다가 해고당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을 하고자 일본으로 갔다.

1922년 일본 도쿄에서 고학으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뒤 문화신문(文化新聞)을 창간하고, 니가타현(新潟)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을 보도하게 되는데 이때 유학생 항의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왜경의 감시를 받게 된다. 니가타 사건이란 다름 아닌 101명의 조선인 징용자들이 몰매를 맞아 죽은 학살 사건이다. 1922년 7월 26일 일본인들은 니가타 신월전력공사에서 징용자들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노임도 주지 않고 폭행과 학살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방한민 선생은 이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보도하고 조선 유학생들의 항의 데모를 조직하여 왜놈들의 살인 만행을 준열히 단죄 규탄했다. 이 일로 문화신문은 발행 정지되었고 신문주필인 방 선생은 요시찰 인물이 되어 급기야 일본땅을 떠나 1923년 1월 중국 용정으로 가게 된다.

이곳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활동하던 곳으로 여기서 방한민 선생은 동양학원(현, 용정중학교)을 설립하여 민족의 주권 찾기, 조국광복을 위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홍범도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봉오동 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9월)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면 방한민 선생은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조국독립의 확신을 심어 주었고 날카로운 붓을 휘둘러 민족정기를 북돋는 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방한민 선생은 1923년 8월 일제가 천보산 광산에서 금광석을 약탈하려고 철도건설에 착수하는 등 착취 작업을 서두르자 철도개통식에 참석예정인 일본 총독을 살해하고 일본은행 등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교란시켜 민중봉기의 기회로 삼고자 비밀리에 준비를 하던 중 발각되어 폭탄 30여 개와 선전문 등을 압수당했다. 이때 방한민 선생은 함께 일을 도모했던 애국지사 23명과 체포되었으나 이 사건은 식민지 통치를 꾀하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 중대한 일로 체포된 방한민 선생은 사경을 헤맬 만큼 갖은 고초를 당하였는데 때마침 보도된 방 선생의 신문 기사를 본 논산군 강경면 주민 319명의 진정으로 가출옥 된다. 이후에도 1931년 열성자회 사건을 비롯한 굵직한 독립운동을 주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일생을 헌신하셨다.

정부는 방한민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2010년 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방 애국지사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게 했다.

▲ 국립대전현충원 방순희 애국지사 무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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