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글고도 갸름한 얼굴
백옥같이 고운 피부
호수에 비친 가을 달빛처럼 맑고 청순한 이여

어쩌다 모진 세월 만나
그 향기 스스로 사르지 못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해어화 되었던가

비록 사내놈 손 잡혀 술 따른다 해도
영혼까지 주진 않았을 터

기미년 삼월의 만세 소리 드높인 기상
안성장터를 울리고
경성의 하늘까지 치달았을진저

흰 저고리 피로 물들어도
웃음으로 밝은 세상 꿈꾸던
안성 기생 변매화

기억하는 이 없어도
초가을 호숫가를 비추는 보름달처럼
멀리 고운 자태로
그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을 그대여.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 기생의 신분으로 만세운동 앞장선 변매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친일했다.”는 친일파들의 궤변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 변매화 (卞梅花, 1900~ 미상)

한성권번 꽃수풀에 일지 매화 피어 있어
백화난만 붉은 중에 맑은 향기 자랑타가
봄소식을 전하려고 안성조합 옮겨오니
탐화봉접 때를 만나 날아들고 모여든다

이 세상에 착근된 지 십구 춘광 되었으며
아름다운 꽃 얼굴은 달 정신이 완연하고
맵시있는 앞 뒤태도 세류여의 꾀꼬리라

가사시조 각항춤과 서울 평양 영남소리
철을 맞아 배웠으니 물론 능란할 것이오
필저 외 지겸비 하여 매화국화꽃 잘 그려.

<조선미인보감>에 나오는 변매화의 평이다. 변매화는 원적이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장기리 373번지이며 1919년 발간된 <조선미인보감>에 19살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00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담하고 날씬한 몸매에 양산을 받쳐 들었지만 요염하기보다는 쪽진 모습의 얼굴이 야물 차게 생겼다. 이 책에는 변매화를 가르켜 “가사, 시조, 경서남(京西南) 잡가, 각종 무용검, 승무, 양금, 매화국죽이 능함”이라고 써 놓았다.

변매화 외에 ‘안성기생조합’ 출신 기녀는 송계화, 고비연, 리봉선, 강련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이 매일신보 1919년 4월 3일 자의 “31일(3월) 오후 네 시쯤 되어 안성기생조합 일행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했다.”라는 내용의 주인공일 것이다.

당시 안성조합에서 활동한 기녀 수는 한성의 175명, 수원의 33명에는 못 미치는 수였지만 평양의 7명이나 개성의 3명에 견주면 그리 적은 수도 아니었다. 이들은 김향화 등 수원 기생 33명이 고종의 장례에 맞춰 소복을 입고 서울로 올라가 통곡하고 이어서 3·1만세운동에 앞장선 것처럼 식민지 조선의 울분을 앉아서만 당하지 않았다.

안성 기녀들의 억척은 중외일보 1927년 12월 31일자에도 엿 볼 수 있는데 안성읍내 상춘관 소속의 기생들이 주인의 못된 학대와 자유의 억압을 들어 동맹파업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비록 춤추고 노래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스스로 권리를 찾으려 파업도 불사했으며 위기에 빠진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한 그들이었다. 안성조합의 변매화도 그런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이들의 독립운동 사실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았다 해서 기녀들의 높은 애국심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한 부족한 연구는 후학들의 과제라고 본다.

다만, 안성기생조합원 가운데 리봉선은 1932년 4월 9일 자 매일신보 7면에 “조선호(朝鮮號) 헌납금 국민협회취급”이란 기사 속에 있는 것으로 보여 일제의 헌금모집에 돈을 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전후 상황이 없는 상태라 이 부분에 대한 연구 역시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안성기생의 만세운동 기사 (매일신보 1919년 4월 3일자)

<더보기> 전국각지의 기녀(妓女) 독립단

“저 풀을 보라. 들불이 다 불사르지 못한다. 봄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난다. 어찌 우리 2천만 국혼만이 그런 이치가 없겠는가! 이것이 내가 우리나라는 반드시 광복하는 날이 있다고 믿는 이유이다. (중략) 3월 23일에는 기녀 독립단이 국가를 제창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남강을 끼고 행진하니 왜경 수십 명이 급히 달려와 칼을 빼어 치려하자 기생하나가 부르짖었다. ‘우리가 죽어 나라가 독립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자 여러 기생들은 강기슭을 따라 태연히 전진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박은식<한국독립운동지혈사> p218, 진주 기녀독립단 -

그렇다. 나라의 존망을 앞두고 기생들도 그냥 바라다보지만은 않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진주지역뿐만이 아니다. 조국을 찾자는 독립운동에 수원 기생들도 만세 행렬에 앞장섰고 안성기생조합 소속 기생들도 한마음으로 읍내로 뛰쳐나왔다.

“3월31일 오후 네 시쯤 되어 안성조합기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시작하매 안성 부(安城府) 각 처에서 일시에 소동이 일어 군중 천여 명과 같이 연합하여 태극기를 일제히 흔들고 군청과 경찰서, 면사무소에 들어가서 만세를 부르고 동이동산에 올라 일제히 한국 태극기를 꽂고 산이 진동하도록 소동을 한 뒤에 안성부 내 일원을 곳곳에 돌아다니면서 고성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오후 여섯 시 경 진정되는가 했더니 그날 밤 일곱 시 반쯤 되어 다시 소동이 시작되어 군중 약 3천 명이 각각 등에 불을 켜들고 소동하매 면장 민영선 씨가 보통학교로 집합케하엿더라 -매일신보 1919년 4월 3일자 (안성분국통신)”-

독립운동을 ‘소동’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안성분국의 매일신보 기자는 친일파이거나 일제의 앞잡이일지도 모른다. 제 겨레 사람들의 만세 운동을 강 건너 불 보듯이 쓰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에 앞서 30일 오후 일곱 시에는 안성군 읍내면 석정리에서 군중 1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시작하여 금세 1,000여 명으로 불어나 안성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어 읍내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유리창을 깨고 군청으로 몰려가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안성 부민(府民)들의 저항을 이어받은 기생들의 용감한 만세운동 합류로 안성의 독립운동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기녀들의 독립운동이야기는 <서간도 들꽃 피다> 1권 39쪽 “수원의 논개 33인의 꽃 김향화” 편에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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