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희옥 애국지사 집안 3대의 “의병장 해주 오공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왼쪽), 기적비 앞에서 묵념하는 오희옥 애국지사(가운데)와 이윤옥 시인(왼쪽), 이화련 기자.


수원 조원동 13평 복지아파트를 찾은 날은 6월 1일로 한낮 기온 28도까지 올라 무더운 날씨였다. 이날 답사에는 오희옥 애국지사와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20인 ≪서간도에 들꽃피다≫를 펴낸 이윤옥 민족시인과 민족정신을 구현하는 수원일보 이화련 기자가 함께했다.

오희옥(吳姬玉, 1926. 5. 7~ ) 애국지사는 경기도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 오광선(吳光鮮)의 둘째 따님으로 87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었다. 오 애국지사는 무려 5시간이 넘도록 독립운동의 산실인 용인 원삼면과 즉능면 일대를 둘러보고 오는 길 내내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과 화산면 일대는 오희옥 애국지사의 외가와 친가가 있는 곳으로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과 아버지 오광선 등 3대의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기리는 <의병장 해주 오공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가 세워져 있어 오씨 문중의 쟁쟁한 독립운동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 국군이 창설되면서 당시 최고 계급인 대령에 임명된 직후의 오광선 장군(왼쪽). 하루 가마솥으로 12번 밥을 지어 독립군을 먹여 살렸던 정현숙 애국지사.


죽능면 출신인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 (1867-1935)은 18살부터 사냥을 시작해 용인·안성·여주 일대에서는 그의 솜씨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가 일진회 송종헌의 밀고로 8년형의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20년 겨울 만주 통화현 합리화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던 아들 오광선을 찾아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아버지 오광선 장군 (1896-1967)은 이청천(李靑天) 장군과 함께 만주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광복군을 양성하면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중대장으로 맹활약을 하였다.

또한, 어머니 정현숙 (일명, 정정산, 1900-1992) 역시 중국땅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를 수행했으며,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니 오희영 (吳熙英, 1924-1969)과 형부 신송식은 민족혁명당원으로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 제1과에 소속되어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한 애국지사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의 일념을 품고 의병항쟁 활동을 한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을 비롯하여 아버지 오광선 장군, 어머니 정현숙은 물론 형부 신송식과 언니 오희영 그리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으로 활약한 오희옥 애국지사까지 해주 오씨 집안의 3대에 걸친 광복운동은 대한민국 광복의 역사와 함께 길이 기억해야 할 집안임을 새삼 느꼈다.

 

▲ 정현숙 애국지사의 생가.
▲ 오광선 장군의 생가터는 헐린 채, 지금은 전원주택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답사를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 것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생가의 운명이었다. 먼저 화산면 요산골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오희옥 여사의 친정어머니 정현숙 애국지사의 생가는 쓰러져가는 집을 포함하여 이 일대 땅이 따로 주인이 있어 도지세(임차료)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방문자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산면 느리재 죽능골에 있던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의 생가는 헐려 버린 채 지금은 외지인의 전원주택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처연함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도 지자체의 돈으로 생가를 복원하여 화려한 팻말을 세워두는 판에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을 한 이들의 생가는 돌보는 이 없이 쓰러지기 직전이거나 헐려나가 버리고 작은 팻말 하나 없는 현실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아팠다.

역사가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면 역사를 읽으라”고 했건만 독립운동가의 역사를 말해주는 생가 터는 방치되고 외면된 채 외지인들에게 팔려나가 그들의 고기 굽는 정원이 되거나 주차장이 되어 있는 상황이니 의병장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살던 마을을 둘러보는 노구의 애국지사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현장 대담>

 

▲ 생가 마루에서의 오희옥 애국지사(오른쪽)와 이윤옥 시인

- 의병장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느낀 점은?

“아주 오랜만에 와보니 더욱 감개가 무량하다. 나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은 모두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시던 원삼면 죽능리와 어머니 생가가 있는 화산면 요산골에 오면 언제나 감회가 새롭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혼자 와보기도 어려운데 이렇게 와보니 마음의 고향을 찾은 것 같아 기쁘다. 다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시던 집이 그 흔적조차 없어져 안타까울 뿐이다.”

 

- 아버지 오광선 장군에 대한 추억은?

“7살 정도로 기억하는데 그때 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고 나와 언니는 집 근처 학교를 다녔다. 하루는 학교에서 일본 책을 나눠 주었는데 아버지가 보시고는 ‘안 되겠다. 일본 글을 배워서는 안 된다.’라고 하시며 책을 내다 버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학교에서 숙식을 하셨고 가끔 집에 들르셨는데 집안에도 들어오지 않으시고 밖에서 잠시 어머니만 뵙고 가신 기억이 난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가족과 떨어져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어린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만 알았다. 천진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낸 2년을 제외하고는 아버지와 만나지 못한 채 해방 후에 뵐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가족과 떨어져 독립운동을 하다가 신의주 감옥에 갇히는 등 온갖 고초를 당하셨다고 한다.”

 

- 어머니 정현숙 애국지사는 어떤 분이셨나?

“어머니는 쌀 한 가마니를 번쩍들 정도로 체격이 우람하고 힘이 센 여장부였다. 가족들이 처음에 도착한 만주 길림성 액목현에서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고 농사도 잘 지었다. 여기서 나온 쌀로 커다란 가마솥에 하루 12번씩 밥을 해내어 독립군 뒷바라지를 해냈다.

당시 어머니의 밥을 안 먹은 독립군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독립군 뒷바라지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이 아버지를 안중근과 윤봉길 의사처럼 특수임무를 맡겨 북경으로 부르는 바람에 그만 아버지와 식구들이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이 넘도록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고 임시정부 피난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신한촌이라 불리는 토교에 살 때는 생활고가 극에 달했다. 어머니는 삼 남매를 키우려고 남의 집 빨래와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았고 돼지를 키워 우리를 학교에 보낼 만큼 억척스럽게 일하셨다.”

 

- 언니 오희영 애국지사와 함께한 독립운동 기억은?

“1939년 유주(柳州)에서 언니와 나는 한국진선청년공작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중국과 합작하여 일본놈이 저지른 참상을 연극으로 백성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또한, 거리선전공작과 연설을 하였으며 극장에서는 무용이나 연극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언니는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는데 남자처럼 활달했으며 이후 광복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1944년 한국독립당에 들어가 김학규 지사가 지대장인 제3지대에서 여성대원으로 훈련을 받았다.”

 

- 연세가 높으신데 요즘 건강은?

“고혈압, 골다공증, 관절, 역류성위염 등으로 하루에 약을 8~9개씩 먹고 지낸다. 하지만, 날마다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면서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서예교실에 나가서 이웃들과 붓글씨를 쓰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의병장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고향을 둘러보러 나섰던 날의 오희옥 애국지사 모습은 비교적 건강 해보였다. 용인지역을 둘러보고 수원의 열세 평 복지 아파트에 다시 모셔다 드리고 나오는 길 담 모퉁이에 핀 붉은 장미가 환하게 미소 짓는 가운데 3층 베란다에서 오 애국지사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필자를 향해 언제까지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글 · 사진 =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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