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탄계 냇물에 비친 하늘
먹구름 걷히어 맑고 맑구나
물 건너 신한촌 옹기종기 모인 동포들
콩 한쪽도 나누며 나라 사랑으로 살아갔지

이역만리 고향땅 기약 없이 떠나온
의병장 명포수 할아버지 뒤를 이어
아버지 어머니 남편 여동생까지
독립의 끈으로 묶인 나날들

유주 부양 중경으로 터 바꾸며
열여섯 소녀 광복군 되어 
굴곡과 고난의 가시밭길 걸어간 자리

해마다 잊지 않고 피어나는
챠우쉔화 꽃향기 속에
살아나던 독립의지
하늘에 닿았으리.


*화탄계: 임시정부요인들의 가족이 살았던 중국 중경 근처 토교의 신한촌 앞을 흐르는 냇물
*챠우쉔화(朝鮮花):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에 핀 노오란 들국화를 현지인들이 애처로워 부른 이름

▲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기념(1945. 11. 3). 뒷줄 ○표한 사람이 오희영 애국지사 <사진=오희옥 여사>

● 오희영 (吳熙英, 1924.4.23 - 1969.2.17)

오희영 애국지사가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액목현으로 이곳은 서로군정서 본부가 1920년 일제 토벌군을 피해 이동한 이래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한 곳이다. 아버지 오광선 장군이 활동하던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두 살 아래인 오희옥 애국지사도 태어났다.

오 애국지사의 본가 고향은 용인으로 할아버지 오인수는 의병장 출신이고 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이름이 성묵 ‘性黙’이었으나 조국의 광복을 찾겠다는 뜻으로 광선‘光鮮’으로 바꿀 만큼 혈기 넘치는 독립투사였다.

또한 어머니 정현숙(일명, 鄭正山) 여사는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결성하여 맹활동하였으며 오희영 애국지사의 남편 신송식 역시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어 서안(西安)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를 거쳐 오희영 자매와 사위까지 오씨 집안의 독립운동 내력은 그 자체가 역사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이다. 오희영 애국지사의 동생 오희옥 애국지사는 지금 수원에서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생존해 계신다. 2012년 현재 86살이다.

오희영 애국지사는 중국 유주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였다가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오광심·김효숙 등과 함께 여군으로 입대하여 제3지대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 김학규 제3지대장의 인솔 아래 왜적의 점령지구를 돌파하여 오광심·이복영·신송식 등과 함께 중국군 유격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부양(阜陽)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 전체가 그러했듯이 제3지대도 최종적으로는 국내에 진격하여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을 감행하기 위한 목표 아래 편의상 고국과 최단 거리 지점인 산동반도(山東半島)로 진출할 것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공작 기지를 부양(阜陽)에 설치하여 그곳에 본부를 두게 되었는데 이곳은 가장 위험한 적 점령 지구 근처였다. 부양은 사통팔달의 교통[육로·수로] 요충이었기 때문에 수시로 또는 기민하게 왜군 점령 지구 내에 대한 군인을 모으거나(초모)·선전·첩보 공작 활동은 물론 한·중 합작 게릴라전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오희영 애국지사가 속한 제3 지대의 초기 공작 활동의 중점은 첫째, 적 점령 치하의 조선출신 애국 청년들을 모으고 둘째, 적 점령 지역 내에 광복군의 공작 거점을 구축 확보하면서 비밀 지하 조직망을 넓히고 셋째, 적 왜군의 군사 기밀을 탐지하며 필요에 따라 중국 유격대와 같이 왜적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는 데 두었다. 한마디로 적진 깊숙이에서 왜적과 맞섰던 것이다.

1944년에는 부양(阜陽)에서 군사 교육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단의 1기 졸업생들과 함께 신송식(申松植) 교관의 인솔 아래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중경(重慶)으로 가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주석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면서 1944년 임시정부요인들이 거주하던 토교에서 한필동 목사의 주례로 독립운동가 신송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 뒤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다.

“언니는 당시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었습니다. 또 말도 청산유수였고 남자처럼 활달한 성격이었지요.” 동생 오희옥 애국지사를 얼마 전 찾아뵙고 우렁이 된장으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언니 오희영을 그렇게 기억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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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1867.2.2 - 1935.10.23)

해주 오씨 오희보의 13대손으로 부인 이남천 여사와의 사이에서 4남매를 두었다. 18살부터 사냥을 시작해 용인·안성·여주 일대에서는 그의 솜씨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하며 인근 포수들의 화포계(火砲契)에서 매년 1등을 차지할 만큼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오인수는 농민출신인 이인웅이 이끄는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유학자 출신 정철화 부대에도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약 1백여 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남상목, 김군필 부대가 힘을 모아 안성 매봉재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일진회 소속 송종헌의 밀고로 8년형의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20년 겨울 만주 통화현 합리화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던 아들 오광선을 찾아 망명한 뒤 1935년 10월 23일 하얼빈 부근에서 67살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오광선 장군(1896.5.14-1967.5.3)

이청천(李靑天) 장군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서로군정서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들이 노령으로 이동할 때 조직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중대장을 맡아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이른바 ‘자유시참변’에서 일대 수난을 당하였다.

자유시참변이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데 이때 오광선 장군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1930년 한국독립당이 결성되고 그 산하에 한국독립군이 편성되자 그는 의용군 중대장으로서 총사령장관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 오광선은 이청천 등과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하다가 또다시 1940년 1월 베이징에서 일제에 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광복 후에는 광복군 국내 지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육군 대령으로 임관되었다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어머니 정현숙(일명, 정정산, 1900. 3.13 - 1992. 8. 3)

1918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별동대장과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부군 오광선(吳光鮮)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 뒤 1935년까지 만주 길림성(吉林省) 일대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이후 중국 남경(南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결성하여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44년 무렵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남편 신송식(1914.3.4 - 1973.2.29)

평남 안주(安州) 사람으로 1936년에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기 위해서 활동하였으며, 이듬해 4월부터 중국 중앙포병 51단 소위로 임명 배속되어 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41년에는 민족혁명당원으로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가입하여 제1지대에 편성되었다가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전입되어 서안(西安)에서 활동하였다. 1942년 초에는 광복군 제3지대 지대장인 김학규(金學奎)의 인솔로 일군의 점령지구를 돌파하여 중국군 유격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부양(阜陽)에 도착하였다.

부양(阜陽)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대한 각종 공작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역일 뿐 아니라 한중 합작 게릴라전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김학규 지대장은 부양(阜陽)에 초모공작분처를 설치하고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에 병설로 설치된 한광반(韓光班)의 교관으로서 광복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45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 제1과에 소속되어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동생 오희옥(1926. 5. 7 - 생존, 수원시 거주)

1939년 4월 중국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대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연극·무용 등의 문화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일본군의 정보 수집과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역할을 도왔다. 청년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의 일원으로 첩보 활동과 문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담당하였다. 그리고 1944년부터는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하였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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