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진 옥토 뒤로하고 떠난 혹한의 땅
서간도 망명 살이 속절없는 세월

풍토병 돌아 황천길 간 친정집 숙부 삼남매
일제에 피살된 시삼촌
친정아버지의 옥살이
시숙 잃은 시숙모의 도진 정신병

냉수 떠놓고 혼약한 열일곱 새댁 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시련의 연속이었어라

만주 호랑이 시아버님 
평생에 세 번 뵙고
입쌀밥 한 끼 못해 올린
불초한 며느리라 목이 멨지만

소금절인 무김치에 좁쌀 밥도
배불리 못 먹는 동포들 신세
만주땅 허허벌판 개간하여
근근이 풀칠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네

여덟 살에 떠난 고국 77년 만에 돌아와 보니
무심한 고국산천 그대로건만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져간 시아버지
꿈에도 고국 땅을 그리던 남편이 눈에 밟혀
내딛는 걸음걸이 휘청대누나

김포공항 입국장에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
아버님이시여
낭군이시여 들리시는가!

▲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시아버지 일송에게 보내드리려고 하얼빈에서 찍은 사진(1934). 앞줄 왼쪽 끝이 이해동 여사 가운데 아기 안은 분이 시어머니 박순부 여사. <사진=명지출판사>
 

● 이해동 (李海東, 1905.12.23 - 2003.8.20)

“나는 양반집 큰딸로 태어나 가정주부로 평생을 살았다. 현대교육을 못 받았으므로 어떤 사회제도가 살기 좋은지 어떤 사상주의가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없지만 오직 시아버님(김동삼)께서 고향과 처자를 버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거룩한 업적만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속으로 잊지 않고 존경해 왔다.

바로 내 마음속에 이런 기둥이 있었기에 그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굴함 없이 꿋꿋이 살아 올 수 있었다. 어느 때이고 세인들 앞에 내 마음속의 기쁨과 고통을 실컷 하소연하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지녔음인지 80이 넘도록 천한 목숨을 살려왔다.”고 이해동 여사는 ≪만주생활 77년사≫ 머리말에서 밝혔다.
    
“어머님은 자기의 과거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싫어하는 천성이 있다. 그러나 생생한 어머니의 고난사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국땅에 망명한 한 여성과 가족의 고난사이며 나아가서는 현대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역사적 사명이다.” 이해동 여사의 아들인 김중생 씨는 어머니 수기 머리에서 “어머니의 만주 이민사”는 결코 개인의 일이 아님을 역설했는데 글쓴이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해동 여사의 수기 한 권이야말로 그간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던 독립군 가족사의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해동 여사는 누구인가? 조동걸 국민대교수의 ‘만주 독립군 이면사 증언 살아있는 역사’를 통해 살펴보자. “85세의 할머니 이해동 여사가 만주생활 77년을 끝내고 지난 18일 영주 귀국했다는 소식이 지상을 메웠다. 그리고 19일부터 조선일보에 여사의 ‘난중록’이 연재되기 시작하였다. 10리 밖도 나가보지 못한 일곱 살의 어린 소녀가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삭풍 휘몰아치는 만주로 떠나던 1911년은 서울 양반들이 그 미끈한 일본인의 흉내를 내기에 바빴고 시골에서는 망국이민이 누더기를 감싸고 산비탈 오솔길을 따라 북으로 탈출해가던 해였다.

그 행렬에 끼여 이해동 여사가 만주로 갔던 것이다. 도산(陶山)을 떠나 안동, 예천, 상주를 거쳐 김천까지 250리는 아마 걸었을 것이고 김천부터는 기차로 갔으리라. 이 무렵 안동 일대에서 1백여 호가 갔으니 줄잡아 5백여 명은 넘었을 것이다. 1911년 여사의 일행이 떠난 것은 한말 애국계몽주의 지하단체였던 신민회의 신한촌 건설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이해동 여사는 정부로부터 훈·포장을 받은 바가 없다. 그러나 이해동 여사만큼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서 있던 분도 드물다. 이해동 여사를 비롯한 여성들이 어떻게 만주땅에서 살아왔는가를 우리는 살펴야 한다. ≪독립운동사 제10권 : 대중투쟁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처절함 속에서 활화산처럼 독립운동의 불을 꺼뜨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만주 노령에는 19세기 이래 많은 한민(한국인)이 이주·정착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일제의 만행에 대하여 국내인 못지않게 분개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맛보는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망명해 온 수많은 한민들은 민족 지도자층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조국애를 갖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정착해있는 한민을 배경으로 항일 구국 무력 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되어 일본병사의 간담을 서늘케 했었으며 독립군 전투에 대한 부녀들의 후원도 그치지 아니했다. 특히 1919년 3·1 만세운동에서의 여성의 활약은 만주지방의 부녀들을 분기(奮起)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

간도에서의 항일투쟁은 3·1운동 이전보다 격렬하여졌다. 이제 독립은 일제와의 교전(交戰)을 통해 실력으로 쟁취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독립운동계를 크게 지배하여 국내외에서는 장차 치를 독립 전쟁준비에 바빴다. 무장독립군들이 곳곳에서 맹훈련을 받으며 또 왜적과의 교전도 빈번하여졌다. 왜적과의 교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병력 수가 적은 까닭에 군량과 무기의 수송에 운반이 용이치 않았던 점이다. 이에 부인들은 교전 때면 으레 용감히 이들의 뒤를 후원하였던 것이다.

1920년 말경에 북간도 방면에서 우리 독립군이 왜적과 교전하였는데 아군 측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교전이었으므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지방 부인들이 애국하는 일편단심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탄우(彈雨)가 쏟아지는 위험한 전선에 뛰어들어 피로한 군인들을 위로하고 공궤(供饋)를 하였다. 어떤 군인이 분전(奮戰)하여 먹는 것조차 잊으면 부인들이 울면서 ‘만일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 하면서 기어이 먹게 하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부인들의 이 같은 위로는 독립군의 용기를 백배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들은 교전 시에 무기 운반 또는 왜병의 무기창고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일등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독립쟁취를 위한 남녀 상호 간의 협조 노력은 우리 민족이 어떤 고난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역량 있는 민족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 말 없는 여성독립군들은 그러나 역사책 어느 한 줄에도 남아 있지 않다. 이름 석 자라도 남은 여성들은 그나마 다행이다. 보훈처에 이름을 올리고 훈·포장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204명(2011년 현재)이다. 이해동 여사는 물론 여기에 없다. 국가로부터 훈·포장을 받은 남성들이 12,000여 명인데 견주면 여성들은 거의 역사의 조명에서 비켜간 느낌이다.

이에 대해 서중석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에서 “1910년대 서간도에서 여성문제에 관하여 써놓은 자료는 드물다. 남성중심의 사회이자 준전투적 집단이어서 주로 일반 주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였거니와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조명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 성과가 나오길 고대한다.


<더보기>

만주호랑이 일송 김동삼 선생은 이해동 여사의 시아버지
“일송  김동삼(金東三,1878.6.23~1937.4.13)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니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달라.” 만해 한용운은 생전에 눈물을 딱 한 번 흘렸는데 일송 선생의 장례식에서였다 고한다. 그만큼 조선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일군 분이 일송 선생이다.

김동삼 선생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의성(義城) 김 씨이며 호는 일송(一松)이다. 선생은 호처럼 한그루의 꼿꼿한 소나무와 같은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김후병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중학교(協東中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년 국권침탈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通化縣三源堡)에서 이시영·이동녕·이상룡·윤기섭·김창환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1913년에 여준·이탁 등과 남만주의 동포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민생교육과 군사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같은 해에 이탁·김창환 등과 유하현(柳河縣)의 밀림지대에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설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이상룡·이탁 등 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에서 회동하여 부민단을 확대, 개편한 한족회(韓族會)를 발족시켰으며, 그 서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이 되었다.

1920년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소속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 속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했으며, 다시 11월에는 북로군정서군 및 홍범도(洪範圖)의 군과 합세하여 밀산(密山) 및 러시아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희생을 줄였다.

1922년 연해주(沿海州) 각지 등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끝에,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였으며 그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23년 북경(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대회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이때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의 대립을 조정하여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ㆍ행정위원에 취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일본경찰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1926년에는 두 차례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지청천·현정경·이규동 등과 두 차례나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진행하였다. 그해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의 의장을 맡았으며,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내적인 모순점을 정리하면서 유일당 결성에 주력하였다.

만주사변 때 하얼빈 정인호의 집에 투숙 중 동지 이원일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니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을 한강에 뿌렸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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