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불빛 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 중

일본 사쿠라다몽으로 떠나는
이봉창 가슴에 안겨 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이루지 못했어도
혼비백산한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 게다

석 달 뒤 상하이홍구 공원
물샐틈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이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삼림 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길이 남으리.

 

▲ 이화림 애국지사가 다닌 손문이 세운 중산대학은 조선인들이 많이 다녔다.

● 이화림 (李華林, 1905.1.6 - 미상)

 

“한인 애국단의 핵심 멤버 3인으로는 이봉창, 윤봉길, 이화림이며 이화림은 1905년 1월 6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3·1운동 참가 후 평양 일대의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1930년 상해로 건너가 사격, 무술을 배웠고 일본군 밀사들을 유인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이봉창 이 동경에서 던진 수류탄은 이화림이 상해에서 만들어 다리 사이에 채워준 주머니에 담아 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당시에도 김구의 지시로 윤 의사와 위장 결혼, 함께 현장에 접근하여서 했다는 것이다. 거사 당일 두 사람이 김구 앞에서 선서를 하기까지 했으나 현장으로 떠나기 직전 김구가 “두 사람을 모두 잃을 수는 없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윤 의사만 혼자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거 이후 이화림은 중산대학에서 법학을 두 학기 공부하였고 다시 의학부로 전과하여 간호사 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공산당계열의 태항산 무장항일세력에 참가, 김학철 등과 같은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0년에 낙양(落陽) 부녀대장, 1941년에 태항산 부녀대대장, 1944년 연안의대를 졸업하고 1947년부터 하얼빈시에서 의사 생활을 하였다. 중공정권 수립 후에는 북경 교통부의 위생부 간부 등을 지내고 1979년 공직생활을 마친 후 요령성 대련시 정부 시찰원 (고문직)직책을 갖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헌 윤봉길 평전> 김학준 저 p368 -

김학준 교수는 중국 길림성 연길시 <天池> 문학잡지사 부총편(부주간)으로 있는 장지민 씨가 윤봉길 의사 의거 60주년 기념사업회와 조선일보사에 보내온 이화림에 대한 자료를 인용 위와 같이 밝혔다. 이 자료를 조선일보는 1991년 12월 7일 자로 다루었으니 꽤 오래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다.
 
지금은 중국 여행이 흔해 상해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윤봉길 의사의 유적지인 홍구공원을 들르게 된다. 현재는 중국작가 노신(魯迅 ‘루쉰’을 기념하여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곳에 서면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던 그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히로히토 천황 생일(천장절) 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일대의 파문을 일으켰는데 이 일로 장개석(장제스) 총통은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을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이었다.
 
이화림은 상해로 건너가기 전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조직한 역사문학연구회에 가입하였는데 이것은 훗날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의 오빠 둘은 이미 중국에서 한국독립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오빠들의 영향도 있어 그가 평양에 머무르지 않고 국내보다는 비교적 활동영역이 넓은 중국행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 온 이화림은 상해의 번화한 모습 속에서 한없이 작은 조선의 실체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괴로워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격과 무술을 익혀 신체 단련을 하면서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찾아가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게 된다. 처음에 김구는 이화림이 여성이라는 점과 또 간첩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선뜻 대원으로 받아 주지 않았지만 그녀의 강인함과 적극성에 김구는 이화림을 윤봉길과 이봉창과 함께 대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봉창 의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폭탄을 무사히 운반하도록 도운 이도 이화림이었다. 이봉창에 대한 인상을 이화림은 이렇게 말했다.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콧마루, 갸름하면서도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퍽이나 패기 있고 당차 보였다. 김구 앞에서 선서를 끝내고 일본으로 떠난 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거사 며칠 후 중국 신문에 “한인 이봉창 일황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라는 제목 아래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글을 보고 그의 장렬한 죽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러한 이화림(일명 이동해)의 이야기는 <백범일지>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김구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 민족운동방식의 노선 차이를 느낀 이화림이 김구에게 결별을 고하고 떠났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봉창이 “김구 앞에서 선서” 한 사실이나 이화림이 ‘이봉창의 거사’ 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완전비밀 조직인 애국단의 특성상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발설키 어려운 증언이라고 본다.

상해를 떠나 광쩌우로 온 이화림은 중국혁명의 대부인 손문이 광동혁명거지를 창설할 때 국민혁명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중산대학 법학부에 입학한다. 당시 중산대학에는 조선학생 30여 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다수 한인이 수학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국지사들이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진광화, 노민, 이정호, 이동호 등과는 조선인용진학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의 연락을 받고 남경으로 가서 입당하여 부녀대의 임무를 맡게 된다. 부녀대의 임무는 항일선전선동 사업으로 조선인 여성들을 조직, 지도하며 중국여성들과의 연합 통일 전선을 결성하는 일이었다. 이어 1938년 10월 10일에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의 창설이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좌파연합인 조선민족전선 연맹 산하의 무장집단으로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한인군사조직이었다.

민족의 반일역량을 총결집하여 국외에서 민족혁명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원대한 목표 아래 닻을 올린 조직이다. 규모는 100-300명 수준이었지만 대원들의 지적, 언어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 때 정예집단이었다. 1939년 3월 조선의용대 본부의 소환령을 받고 계림으로 간 이화림은 부녀복무대의 부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주로 후방에서 항일선전사업을 전개하였다.

1940년대부터 제3지대와 제2지대는 화북으로 이동하였는데 낙양에서 2-3개월 부대정비와 대원 재훈련기간을 거쳐 1941년부터는 태항산 항일혁명근거지로 이동하였다. 근거지로 삼은 태항산은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산악지대로 곡식이 나지 않는 곳이었다. 주식은 강냉이와 겨를 섞어 먹었고 이마저 부족할 때는 태항산의 돌미나리를 뜯어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하였다. 또 미나리 말린 것과 겨를 섞어 만든 떡, 도토리 가루,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를 뜯어 목숨을 연명하였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 돌미나리
한두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는구나

이화림은 부녀대를 이끌며 도라지 타령을 개사해 만든 “미나리타령”을 부르며 조국광복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렇게 거친 산골짜기나 긴장감이 도는 군사조직에 몸을 둔 탓인지 이화림은 여자라기보다는 남성다운 면이 컸다. 김학철은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에서 이화림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몸에 군복을 입었더라도 여자는 여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결여된 까닭에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한, 속이 옅은, 경박한 편이었으므로 덩달아 이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없다.”

그러나 뒤집으면 이화림은 일부러 남자들에게 냉정했는지 모른다. 남자들이란 조금만 호의를 보여도 다른 생각을 먹기 쉬운데 군사조직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시정의 여자들처럼 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화림은 이집중이라는 조선의용대 총무부장과 결혼했으나 1939년 계림에서 만난 적이 있는 김학철 씨의 회상으로는 이미 이때부터 이화림과 남편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혼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 2년 전 이화림은 조선의용군 병원에서 일하다가 1945년 1월 혁명사업의 하나로 의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정으로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의 길을 걷는다. 해방 후에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하얼빈에서 의사로, 북경에서 교통부, 위생부 간부를 하다 은퇴하였다.

이화림 같은 항일 전사들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 출신들이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숨 바쳐 쟁취한 조국은 아쉽게도 남북으로 갈려 있지만 과거 한목소리로 항일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발굴하여 그 정신을 다시 조명해야 할 것이다.


<더보기> 윤봉길(尹奉吉, 1908.6.21~1932.12.19)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홍구공원을 답청(踏靑)하며-

처처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 일성으로 맹세하세.
 
이러한 두 편의 시를 남긴 윤봉길은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성의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하여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 찬 편지를 남긴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더욱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가서 그해 겨울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천장절 기념식 및 전승 축하기념 식전에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장교와 고관을 처단하였다. 5월 25일 상해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오사카로 호송되어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네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니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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