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살이에 쪼들리는 여자
무식하다고 남편에게 구박받는 여자
집안에만 들어앉아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들
야학에 불러 모아 글을 깨우치고
나라의 위기를 가르치길 수십 성상

배우지 않는 게으름으로
조국 광복 논할 수 없어
불철주야 조선 여자 일깨우려 
삼천리 방방곡곡 밟지 않은 곳 그 어디랴
 
무궁화 꽃 심듯 일군 근화학교
왜놈들 이름 바꾸라 총 들이대
바꾼 이름 덕성은 조선 여자교육의 요람

매국의 더러운 돈 한 푼 섞지 않고
깨끗한 조선의 돈으로만 일구어
더욱 값진 대학

청각장애 딛고 일어나
조선 독립의 밑거름을 키워낸
온 겨레가
숭모해야 할 영원한 스승 차미리사여!


▲ 미국 스캐리트 신학교 재학시절(1910~1912)의 차미리사. <사진=푸른역사>
● 차미리사(車美理士, 金미리사, 1880.8.21-1955.6.1)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조선 여자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직업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해방이니 가정개량이니 하지만은 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기 전에는 해결이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구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조선여자로써는 그렇게 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새해부터는 꼭 조선여자에게 실업 교육을 할 기관을 조선여자교육회 안에 두고 싶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3일-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안다. 내 한목숨이 죽고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 다 잘살 것이 아닌가!" -배화학교 사감 시절-

차미리사는 일제 강점시기에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이다. 차미리사의 일생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독립운동가이며 통일 운동가였다. 차미리사는 국권회복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주의자였다.

둘째, 여성운동가였다. 차미리사는 민족의 독립을 되찾으려면 여성들의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차미리사는 여성의 인격이 무시되는 시대에 태어나 여권신장과 양성평등을 위해 일생 노력하였다.

셋째, 교육운동가였다. 차미리사는 여성들이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려면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3·1 민족정신을 계승하여 조선여자교육회를 세워 조선 최초의 여성야학을 시작하였다. 학교법인 덕성학원의 설립은 차미리사 교육운동의 최종 결실이었다.

넷째, 청각장애를 극복하여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교육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들을 교육한 사회운동가였다.

차미리사는 독립운동, 교육운동, 여성운동의 세 흐름을 주도한 보기 드문 여성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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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가을비 50년 눈물의 세월 회고기 

“金 美理士. 나의 本姓은 車氏. 이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나를 金美理士라고 부르고 나도 또한 金美理士로 행세하야 왓스닛가 일반 사람들은 나의 성이 김씨 인줄로만 알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本姓은 뚜렷한 廷安 車氏다. 진소위 가난한 놈은 성도 업다고 나는 약자인 녀자로 태여나온 까닭에 소위 女必從夫라는 녯 습관에 의지하야 나의 본성을 떼여 버리고 남편인 김씨의 성을 따러서 부탁 김씨가 된 것이다. (조선습관에는 녀자가 반듯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서양이나 일본에는 녀자가 대개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데 나도 예수교회에 드러갈 때에 교회습관에 의지하야 성명을 그와 가티 지엿다.) 지금와서 다시 車氏로 행세하기는 도로혀 새삼스러운 일가터서 아즉 그대로 행세를 하나 그러나 금전상거래(例如銀行通帳)와 증명문서(證明文書)가튼 데는 車美理士로 행세를 한다.
 
나의 출생디로 말하면 서울에서 멀지도 안흔 고양군 공덕리(高陽郡孔德里)이다. 열일곱살되든해 봄에 그 근동의 김씨집으로 출가를 하얏섯는데 3년이 불과하야 전생의 악연이라 할지 이생의 박명이라할지 남편되는 김씨는 불행이 병으로 신음하다가 백약이 무효하고 최후에는 내가 단지(斷指)까지 하얏스나 또한 아모 효과도 보지 못하고 그는 영원한 텬당의 길로 가고 다만 일뎜의 혈육인 딸자식 하나를 남겨두엇스니 그때에 나의 나히는 겨우 열아홉살이엿다. 지금가트면 과부가 시집가기를 례사로 녁이지마는 그때만하야도 여간 행세낫이나 하는 사람의 가뎡에서야 찰아리 죽으면 죽엇지 그러한 생각인들 념두에나 먹엇슬 수 잇섯스랴.

다만 어린 딸을 다리고 친가로 도라와서 눈물겨운 고독한 생활을 하며 무정한 세월을 보낼 뿐이엿다. 그때에 우리 고모님 한 분이 게시엿는데 그는 역시 나와 가튼 방명한 과수택으로서 텬주교(天主敎)를 신앙하다가 중도에 신앙(信仰)을 고치여서 북감리교파(北監敎派)인 상동례배당(尙洞禮拜堂)에를 다니엿섯다. 그는 나의 고독한 생활을 불상히 녁이시고 특히 권유하야 하눌님의 사랑을 밧게 하엿섯다. 그때만 하야도 녀자들이 밧갓 출입을 잘들 하지 안코 간혹한다하여도 교군을 타거나 그럿치 안흐면 장옷이나 치마가튼 것을 쓰고 다니던 때이라. 나도 역시 치마를 쓰고 상동례배당 출입을 하게 되엿다.(중략)
 
나는 신심이 그와 가티 구든 이만큼 교회의 여러사람에게 만흔 신용을 어덧섯다. 그때 가튼 녀자 신도 중에 도신성(趙信聖)이라 하는 동모는 그 중에 선각자로서 항상 나를 권유하야 미국으로 류학가라고 하엿섯다. 그의 충동을 바든 나는 외국에 류학하고 십픈 렬이 날로 타오르기를 시작하얏섯다. 그러나 그때이나 지금이나 돈업는 사람은 아모리 큰 뜻이 잇서도 엇지 할 수 업는 터이다. 다만 혼자 마음에만 애를 태울 뿐이더니 마츰 엇던 친한 이의 소개로 서양사람 선교사 「홀벗트」를 알게 되매 그는 나의 뜻을 가상히 생각하고 중국소주교회(中國蘇州敎會)에 잇는 「고」 목사에게 소개하야 먼 저 중국으로 가게 되엿섯다.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업는 여섯 살 먹은 어린 딸을 다 버리고 산설고 물설은 외국으로 가는 것이 참아 인정에 못할 일이지마는 류학렬이 가슴에 탱중한 나는 그것도 저것도 다 이저 버리고 다만 교회와 趙信聖氏에게 집의 일을 부탁하고 표연히 소주로 향하얏섯다. 소주에 가서는 신학교에 입학하야 약 4개년 간을 신학전공을 하얏섯는데 공부에 넘우 렬심한 까닭이든지 이역풍토에 고생을 넘우한 까닭이든지 격렬한 뇌신경병에 걸니여서 여러 달 동안을 신음하얏섯다. 일시에는 위험한 상태에 까지 이르엇섯다. 지금에 나의 귀가 어두워서 신문이나 잡지 긔자의 붓끗에 조롱을 잇다금 밧게 된 것도 그때에 생긴 병이다. 그 뒤에 미주(米洲)에 가서 잇기는 약 9개년 동안이엿는데 거긔서도 공부한 것은 역시 신학(神學)이오, 거긔에 가게 된 것도 역시 교회의 일로 가게 된 것이엿다. 
 
내가 米洲에 잇슬 때에는 공부보다도 사회의 일에 비교뎍 만흔 활동을 하엿섯다. 혹은 국민회(國民會) 혹은 신문사 혹은 부인회, 긔타 각방면으로 거긔에 잇는 여러 동지들과 가티 일을 하얏섯다. (중략) 처음의 생각에는 조선 13도를 방방곡곡으로 도라다니며 구경도 하고 동지들도 만히 모화 무슨 사업을 하랴고 하엿섯더니 교회에서 나를 붓잡고, 또 배화녀학교의 일을 맛터보라고 함으로 그역 저버리지 못하야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이 그럭 저럭 10개 성상을 보내게 되엿섯다.

긔미년에 OO운동이 이러난 뒤로 나는 무슨 충동이 잇섯든지 구가뎡의 부인들도 한번 가르처 보앗스면 하는 생각이 나서 거긔에 대한 결심을 하고 다년간 정드럿든 배화학교를 사퇴하고 새문안 염졍동(鹽井洞) 례배당의 디하실을 비러 가지고 부인야학을 설시 하얏스니 이것이 곳 오늘날 근화녀학교(槿花女學校)의 전신이다. 그와 동시에 여러 부인 동지들과 또 조선녀자교육협회를 조직하야 혹은 서울로 혹은 디방으로 도라다니며 순회강연도 하고 순회 소인극(素人劇)도 하야 만텬하인사의 다대한 환영도 밧고 원조도 어더서 불완전하나마 근화녀학교의 긔초를 학립하게 되엿다. 현재 청진동에 잇는 녀자교육협회의 소유가옥은 가격으로 말하면 몃 천원어치에 불과하지마는 그것은 서양사람의 돈이나 긔타 외국사람의 돈이라고는 한푼도 석기지 안코 순연한 우리 조선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으로 생긴 것이다. 그것은 우리 녀자교육협회 또는 우리근화녀학교의 한 긔초재산이다. ” 
 -잡지 <별건곤> 제11호, 1928년 2월 1일자 ‘春風秋雨 50년간에 多淚多恨한 나의 歷史’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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