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도 예사로 보지 않고
들어도 예사로 듣지 않던 열여섯 소녀

종로의 만세운동 앞장서다 잡혀갔어도
황해도 배천의 만세운동 또 앞장선 것은
흐르는 피돌기 속 유전인지라

천석꾼 친정아버지
재산 풀어 학교 만들고
화월정 지어놓고
우국지사 모아 나라 걱정 하던 일 보고 자라매
하나도 놓치지 않아

동경 유학 시절 기모노 속
유달리 한복을 고수하고
일본 애들에게 질 수 없다
억척스런 공부는
조선의 힘을 키우기 위한 것

붓끝 움직임마다 여성들이 일어서고
붓끝 휘두를 때마다 남성들이 각성하니
삼천리 조선 땅이 비좁았어라

숨지기 전 사재 털어
후배 여기자 상을 만들고
소중한 가재도구
박물관 기증하니

욕심도 내려놓고
명예도 내려놓은

깨끗한 가을 아침 이슬처럼
살다간 이여!


▲ 서재에서 집필 중인 최은희 여사. <사진=탐구당>
● 최은희(崔恩喜,1904.11.21-1984. 8.17)

● 최은희(崔恩喜,1904.11.21-1984. 8.17)

 

● 최은희(崔恩喜,1904.11.21-1984. 8.17)

 

● 최은희(崔恩喜,1904.11.21-1984. 8.17) 
“최은희는 한국 최초 여기자이며 최초로 전파에 목소리를 싣고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서울 상공을 난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지식인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여성 선각자이다.

 

황해도 연백출신으로 최은희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최은희 집은 오천여 평에 백간(白間)이 훨씬 넘는 집이었는데 서울 어느 재상 퇴물이 내려와서 살던 집에 아버님이 스물다섯 간 산장을 신축하여 화월정이라 불렀고 이곳에는 고을 군수 등 우국지사들이 드나들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그들은 ‘민족의 살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하면서 희망의 대상을 학생으로 삼고 개인재산을 털어 학교를 지었고 아버지는 가끔 최은희가 다니던 학교에 와서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연설을 하곤 했다.

강제병합이 된 1911년 2월 11일 일본 수비대에서는 일본의 기원절이라고 집집마다 일장기를 나눠주었는데 아버님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집 대문에 일장기는 못단다.”고 할 만큼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단호한 분이셨다.

3·1만세운동이 있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저녁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은희는 박희도 선생의 지시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내일 오전 파고다공원으로 전체 학생을 인솔하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최은희는 당시 기숙생들과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렸다. 여학생들은 온종일 시가를 누비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쳐댔다. 상가는 철시했으며 시내는 온통 만세시위뿐이었다.

저녁 무렵 최은희는 동료 32명과 헌병에 체포되어 남산 경무 출감부로 끌려갔는데 30명은 훈방 조치되고 최은희와 최정숙은 죄질이 무겁다고 감방 신세를 져야 했다. 3월 27일 풀려나 황해도 배천(白川) 고향으로 내려가자 이곳은 아직 만세운동이 번지지 않았다. 고을에 나타난 최은희가 도화선이 되어 형부인 송흥국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이 태극기와 안내문들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펼쳤는데 모두 최은희 집에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 일로 또다시 6달의 징역살이를 하고 이후 동경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유학기간 중에도 최은희는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당시에 동경에서 한복차림은 “죠센징짱골라”라는 소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공부도 일본 애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다. 워낙 조선에서도 공부를 잘하던 최은희였기에 영어과목은 월반을 할 정도였다.

 1924년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 3학년을 중퇴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1931년까지 조선일보 기자·학예부장을 지냈고, 1927년 근우회(槿友會) 중앙위원, 1948년 대한부인회 서울시부회장,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당수(1962), 한글학회 지도지원(1971), 3·1국민회의 대표위원(1971∼1973),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등을 역임하면서 사회활동에 전념하였다.

세상을 뜨기 2년 전 모든 재산을 정리, 조선일보사에 5,000만 원을 맡겨 ‘한국여기자상’을 제정하였으며, 모든 자료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그리고 가재도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저서로는 자신의 걸어온 길을 쓴 《씨뿌리는 여인》 (1957), 《근역의 방향》 (1961), 《조국을 찾기까지》 (1973), 한국여성근대사를 정리한 《여성전진 70년》 (1980) 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나라를 되찾겠다고 부른 만세운동이 어째 죄가 되느냐?
                
<崔恩喜 신문조서>

위 피고인에 대한 보안법 위반 사건에 관하여 大正(1919) 8년 3월 7일 京城地方法院 검사국 / 朝鮮總督府 검사 玉名友彥 /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吉田畯 
열석한 후, 검사는 피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다. (중략)

문: 그때 3월 1일에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데 관하여 國民大會가 개최된다는 등의 이야기는 없었는가.
답: 듣지 못하였다.
문: 講和會議에 대한 것은 듣지 못하였는가.
답: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도 그러한 말은 듣지 못하였다.
문: 3월 1일에는 등교하였는가.
답: 오후 2시까지였으나, 조금 일찍 끝났다.
문: 그날 오후에 기숙사를 나와 시내로 나왔었다는데, 무슨 용무가 있었는가.
답: 기숙사 근처에서 만세 소리를 들었고 잠시 후 동료들 20명 정도가 문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그 소리를 따라서 鍾路까지 갔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세 만세」하고 외치고 있었으므로 나는 장래 조선이 독립할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뻐서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문: 그 鍾路通에는 몇 사람 정도의 군중이 있었는가.
답: 수천 명 정도 있었다.
문: 그 후 군중 속에 뛰어들어 후열에 열을 지어서 昌德宮·安國洞·光化門·西大門 근처까지 만세를 부르면서 걸어 다녔는가.
답: 그렇다. 그리고 나서 大漢門으로 갔다가 本町通으로 갔다.
문: 독립의 선언 등이 있다는 것을 미리 듣고 있지 않았는가.
답: 아니다.
문: 國民大會가 개최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가.
답: 몰랐다.
문: 이러한 선언서와 격문을 본 일이 있는가.
     ( 領 제330호의 1·2·3을 보이다.)
답: 본 일이 없다. (후략)

위를 錄取하여 읽어 들려주었던 바, 틀림없다는 뜻을 승인하고 자서하다.
피고인 崔恩喜 

작성일大正 8년 3월 7일 
서기 京城地方法院 검사국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吉田畯 
신문자 朝鮮總督府 검사 玉名友彥 
본 조서는 출장지인 警務總監部에서 작성하였으므로 소속관서의 印을 찍지 못함.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4(三一運動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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