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먼 태평양 바다 건너
어린 젖먹이 두고 떠나는 유학길
갈매기도 애처로워 따라붙었네

조선인 불굴 의지
신천지에 새로 심고 금의환향하던 날
이화동산에서 반기던
배꽃처럼 희고 고운 처녀들

연애도 뒤로하고
유행도 뒤로하고
빼앗긴 고국을 되찾으려
호랑이 사감 되어
다독이던 그 굳은 의지
고종황제와 엄비조차 신임하던
우국의 여인

어느 친일분자의 독약에 뜻 못 펴고
이역 땅 북경에서 눈 감았네

아! 슬프도다.
그 장대한 뜻 펴지 못함이.


▲ 한국인 최초의 자비 유학생 하란사 여사
● 하란사(河蘭史, 1868-1919. 4. 10)

경술국치라하면 1910년의 일로 이 무렵 민족지도자들은 대거 사립학교에 포진하여 자라나는 학생들에 대한 희망을 걸고 교육에 매진했는데 이화(梨花) 하면 하란사를 꼽을 만큼 여성으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하란사의 본명은 김 씨이고 본관은 김해인데 남편 하상기(河相驥)의 성을 따서 하씨로 바꿨다. 한국 풍습에는 결혼하여 성을 바꾸지는 않지만 서양에서는 남편의 성을 따르듯 당시 개화의 물결로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세례명을 쓰거나 성을 바꾸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덕성여대를 세운 차미리사의 경우도 본래는 김미리사였음에도 남편 성을 따른 차미리사로 더 알려졌다.

남편 하상기가 인천의 감옥소의 별감일 때 어린 나이에 1남 3녀를 둔 하상기의 후처로 들어간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남편의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생활이 여유로워졌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고 개화의 물결을 빠르게 인식하여 문명을 선도하는 여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후처라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우리외가에서는 상하친척이 하란사 할머니에 대한 대접이 극진했어요. 할머니는 엄하시면서도 집안을 화목하고 법도 있게 잘 다스렸다.”고 말하는 손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문을 두 번 두드렸으나 기혼여성으로 거절당하자 1890년대 어느 날 밤  이화학당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프라이 학장 앞에서 촛불을 훅하고 꺼 보이며 “우리가 캄캄한 게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 주시오 라고 애원하여 입학시켰다.”고 프라이 학장은 수기에서 밝혔다.

그와 같이 당차고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하란사였기에 젖먹이를 떼어놓고 지금도 쉽지 않은 미국유학의 길로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가상한 것은 그녀가 한국인 최초의 자비 유학생이었는데 이는 농상공부공무국장(農商工部工務局長) 시절 의병(義兵)을 지원했다는 죄로 통감부에서 쫓겨난 남편 하상기의 적극적인 후원 덕이다. ‘외조의 왕’이 이미 1900년대에 있었으니 남편 하상기는 놀라운 선각자이다.

하란사는 귀국하여 1906년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취임하였는데 기숙사생들에게 오는 편지를 일일이 검열할 정도로 엄격했으며 학생들이 교육에 전념하도록 지도했다. 이때 그는 덕수궁에도 드나들며 고종황제와 엄비의 자문에 응했는데 고종은 하란사에게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의친왕과 함께 나라밖 일을 착수하도록 계획했다. 또한, 한일의정서, 협약, 합병조약 등의 원문과 외국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작성하여 하란사로 하여금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윌슨대통령에게 호소하려 했으나 그만 1919년 1월 하순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 초대 여기자인 최은희 씨는 이때 일을 두고 “궁중의 발표가 있기 전 하란사가 국상을 먼저 알고 비밀리에 소식을 전한 것을 보면 의친왕을 통해 독립운동가들끼리 긴밀한 연락을 하며 크게 활약한 것임에 틀림없다.” 라며 당시 이 이야기를 들은 신흥우 박사를 만나 들은 이야기로 회고하고 있다.

하란사는 교육현장뿐 아니라 여류 연사로서도 특출하였다. 1907년 진명학교 주최로 열린 집회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자혜부인회에서 주최한 집회에서는 김윤식·유길준 등 당대의 이름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설을 하였다. 또한, 1910년 신흥우 박사와 함께 미국에서 열린 감리교 집회에 우리나라 여성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에 걸쳐 미국에 가서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연설을 하여 받은 돈으로 당시에는 귀중한 풍금을 이화학당에 희사하여 학생들 교육환경 개선에도 힘썼다.

1919년 일제의 강제병합이 단행되자 기독교 전도를 표면에 내세워 교인들에게 일본을 배척하는 의식을 심어주었는데 이는 수년 전부터 해오던 일로 서울 교외 9개 교회를 돌아가면서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1,400여 호 가정을 방문하는 등 전도를 가장한 민족혼 심기를 했으며 이들을 야학과정에 불러내어 교육을 했다.

그러나 하란사의 국내외 눈부신 활약은 국권상실 직후부터 일본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우리나라 여성대표로 참석하려는 계획이 일본경찰에 알려져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곧바로 북경(北京)에서 병으로 객사하는 불운을 겪는데 일설에는 일제간첩 배정자가 미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등 독살 사망설이 있다. 이는 장례에 참석했던 미국 성공회 책임 베커 씨의 “시체가 시커먼 게 독약으로 말미암은 타살로 추축된다,”라는 증언이 뒷받침해준다. 국권 상실기의 여성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쉰한 살의 아까운 인재가 일제의 모략으로 희생된 것이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경술국치 이후 민족지도자는 거의 사립학교 교원이었다
- 교가(校歌)나 교표(校票)도 한 몫

일제 치하에서 교육 이념을 표면적으로 내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교가(校歌)나 교표(校票) 등을 통하여 민족 교육 이념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는데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교육 이념을 제시한다는 것은 교육상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경술국치 후 비로소 많은 학교에서 교가(校歌)를 만들어 불렀던 점이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 교가는 거의 당시의 민족 지도자가 작사한 민족적이며 항일적인 기상을 담고 있는 점, 또 한편 근대적 자유이념을 구가하고 있는 점이 모두 경술국치를 당한 처지에서 조직적으로 민족교육운동을 펼쳐야 했던 의도적 노력의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정신(貞信)여학교처럼 이미 구한말에 교가를 만든 학교도 있지만 대부분 경술국치 후에 작사하였다. 동덕(同德)여학교가 1911년에, 배화(培花)여학교가 1912년에 만들었다. 조동식이 작사한 동덕여학교의 교가 2절 후단을 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애국가의 첫 소절을 거의 그대로 넣을 정도로 나라를 되찾기 위한 마음을 심으려고 학생들에게 부르고 외치게 했던 것이다.

교가뿐 아니라 교훈(校訓)과 모표(帽票) 등도 대개 이때에 만들어져 보성전문학교는 아예 구황실을 상징하는 이화(李花)를, 중앙학교는 무궁화를 모표에 표현하여 직선적으로 항일학교의 기상을 드높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경술국치 직후의 일련의 작업은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 전열의 정비와 강화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민족교육의 시대적 중요성 때문에 당시의 민족지도자는 거의 사립학교의 교원으로 일했다. 배재의 현순·신흥우·이성렬·이중화, 진명의 김인식, 이화의 하란사(河蘭史),(중략) 서간도 신흥학교의 이회영·이상룡·김동삼, 미주(美州) 네브라스카 소년학교나, 국민군단(國民軍團)의 박용만, 한인여자학원의 이승만 그리고 안창호의 흥사단(興士團) 등을 들 수 있다.

<독립운동사 제8권 : 문화투쟁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1976,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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