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내려오던 큰 종택
임청각 안주인
고래 등 같은 집 뒤로하고
만주땅 전전하며 독립군 뒷바라지
스무 해 성상이었어라

빼앗긴 나라 되찾기 전
조선땅에 유골조차 들이지 말라며
숨져간 석주 할아버님
낯설고 물 선 땅에 묻고 돌아서던 밤
두런거리던 밤하늘의 시린 별들 

밤이 가고 아침이 되면
얼어붙던 가슴 녹여 줄
찬란한 태양이 뜨리라며
한시도 잊지 않은 조국 광복의 꿈
실타래 엮듯 서리서리 품어와
풀으리라던 다짐 다시 꼬였네

어두운 조선을 비관하고 목숨 끊은 시아버님
밥 먹듯 드나들던 형무소 고문으로 숨져간 남편
장사치를 돈도 없이
올망졸망 일곱 남매 데리고
남의 집 문간방 떠돌던 반백의 시간이여

애달픈 운명의 사슬 속에 엉켜버린 삶
그러나 누울지언정 꺾이지 않고
서간도 모진 바람 견뎌온
그대 노오란 한 송이 꽃이었다네.

 

▲ 물색 고운 한복을 입고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 안에서 생전의 허은 여사
● 허은 (許銀, 1907.1.3-1997.5.19)

“서간도의 추위는 참으로 엄청나다. 공기도 쨍하게 얼어붙어 어떤 날은 해도 안보이고 온천지에 눈서리만 자욱하다. 하늘과 땅 사이엔 오로지 매서운 바람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만주벌 혹한을 기억해내는 허은 여사가 남긴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만주 일대에서 추위와 배고픔에도 굴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던 수많은 애국지사와 동포들의 이야기가 꺾이지 않는 생명력의 들풀처럼 잔잔히 펼쳐져 있다.
 
허은 여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대통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이자, 한말 의병장이던 왕산(旺山) 허위 집안의 손녀로 190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아버지 허발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 3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8살 때인 1915년 음력 3월 15일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배고픔과 굶주림이 기다리는 서간도로의 긴 여정에 올랐다. 그것은 독립운동을 위한 투쟁의 첫걸음이었지만 여덟 살 소녀가 이해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열여섯 살 나던 1922년 늦가을 흰 눈송이가 펑펑 내리던 날 하얼빈에서도 천 리나 떨어진 영안현 철령허 친정을 떠나 2천8백 리나 떨어진 완령허 화전현으로 시집갔지만 기다리는 것은 역시 가난과 끝없이 몰려드는 독립군들의 내왕이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삼시 세끼가 녹록지 않았다. 점심준비를 위해 어느 땐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마당의 땡볕에 앉아서 맷돌로 가루를 내어 반죽해서 국수를 해먹었는데 고명거리가 없어 간장과 파만 넣었다. 양식이 없던 어느 해는 좁쌀도 없어 뜬 좁쌀로 밥을 해먹었는데 그것으로 밥을 해놓으면 색깔도 벌겋고 곰팡내가 나서 아주 고약하다.”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나선 여성들의 삶은 끼니때가 가장 고역스러웠다. 그것은 허은 여사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상해 뒷골목에서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주워 독립군의 밥 수발을 해대던 김구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그랬고 우당 이회영 부인 이은숙 여사도 입쌀밥은커녕 곰팡내 나는 좁쌀 밥조차 배불리 해먹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 데서 당시 망명자들의 극심한 식량난을 이해할 수 있다. 끼니를 때울 식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땔나무도 부족했던 시절이라 가장이 독립운동 하러 나간 집에서 이러한 일들은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육체노동에 허은 여사는 급기야 쓰러졌다.

“시집온 다음해에 한번은 감기가 들었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를 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얼른 부추겨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다음날도 못 일어났다. 그때가 열일곱 때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집안에 밀려드는 독립투사들을 건사해야 하는 일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독립군이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회의를 했다. 3월 초 이 집으로 이사 오고부터 시작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회의가 섣달까지 이어졌다. 서로군정서는 서간도 땅에서 독립정부 역할을 하던 군정부가 나중에 임시정부 쪽과 합치면서 개편된 조직이다... 통신원들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춥고 덥고 간에 밤낮으로 우리집을 거쳐 갔다. 전 만주 정객(政客)들 끼니는 집에서 해드릴 때가 많았고 가끔 나가서 드실 때도 있었다....이때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사서 대량생산을 했다....나도 옷을 숱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도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 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독립군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옷을 지어 공급했으니 그것은 이미 개인사를 뛰어넘은 독립운동사의 생생한 기록인 것이다. “1910년대 서간도에서 여성문제에 관하여 써놓은 자료는 드물다. 남성중심의 사회이자 준 전투적 집단이어서 주로 일반 주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였거니와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서중석 교수의 말처럼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 이러한 자료들이야말로 편향된 남성들의 독립운동에서 시각을 돌려 여성들의 숭고한 독립운동사를 되새길 소중한 자료가 아니고 무엇이랴!

99칸 고래 등 같은 집을 놔두고 빼앗긴 국권을 찾아 만주 허허벌판의 풍찬노숙 속에 식구들을 보듬어야 했던 이 시대의 여성들은 그러나 광복된 조국에서 또다시 역사의 뒤안길에서 허덕여야 했으니 이를 시대상황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요, 독립운동 가족에 대한 푸대접이었다.

“초상 때도 식구들은 굶고 있었다. 초상 당하고 법이한테라도 알린다고 애들을 보냈더니 보리쌀 한 말 하고 장과 밴댕이젓 조금을 보내주었다. 송장은 한쪽에 뻐들쳐 놓고 그걸로 보리쌀 한 솥 삶아 발 뻗고 애들하고 먹었다. 그러고 나니 눈이 조금 떠지더라. 목숨이란 게 참으로 모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여 년을 만주벌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귀국한 남편은 모진 고문 등으로 병을 얻어 약한 첩도 못해 먹이고 1952년 6월 8일 46살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남겨진 것은 올망졸망한 아이들과 장례 치룰 관하나 살돈도 없는 가난이었다.
 
 “원수의 육이오 / 피난처 충남에서 / 남편이 병사하니 / 미성년 형제자매 / 누세 종택 큰 문호(門戶)를 / 내 어찌 감당 하리 / 유유창천(悠悠蒼天) 야속하고 / 가운(家運)이 비색(悲色)이라” 허은 여사가 예순여섯에 지은 노래 ‘회상’에는 얄궂은 운명 속을 헤쳐 나온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꼿꼿한 선비 집안의 어머니요, 아내요, 며느리로 흔들림 없는 삶을 살다간 허은 여사의 삶이야말로 광복된 조선을 있게 당당한 독립군의 삶 그 이상이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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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대통령) 시할아버지 석주 이상룡과 안동사람들

▲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 석주 이상룡 선생
석주 이상룡은 안동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가다. 1858년에 태어난 그는 고성 이씨 17세 종손으로 당대 퇴계학맥을 대표한 안동 최고의 유학자이자 독립의병장 서산 김흥락의 제자다. 서산의 영향을 받은 석주는 젊을 때부터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그는 안동에서 계몽운동을 펼치다 경술국치 후 나라가 통째로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더는 국내에 머무르길 거부하고, 애국지사들과 만주에서 독립군기지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1911년 99칸 고래 등 같은 임청각을 떠나기에 앞서 안동에서 가장 먼저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상투를 잘랐다. 이상룡은 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을 세웠다. 이때 들어간 독립군기지 건립과 무기구입 자금에 우당 이회영 일가의 재산 600억 원과 석주의 재산 400억 원 등이 들어갔다고 한다. 몸도 재산도 다 독립운동에 바친 이상룡은 당숙 이승화를 포함한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까지 4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두 동생과 조카를 비롯해 이 집안에서만 9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석주는 이후 서로군정서 독판,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초대 대통령)에 선출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에 힘썼다. 그의 손자며느리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만주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집안의 역사가 담겨 있다. 허은 여사는 왕산 허위가 재종조부이며, 이육사의 모친이 그의 고모다.

석주의 처남인 백하 김대락은 66세의 노구에도 만삭의 손부·손녀를 대동한 채 석주에 앞서 만주로 떠났다. 일제의 마수가 삼켜버린 조선땅에서는 아이도 나을 수 없다는 단호함에 손부와 손녀는 눈보라 치는 서간도 망명길에서 해산했다. 안동을 떠나면서부터 그가 3년 동안 쓴 '백하일기'에는 험난한 노정과 이주민들의 생활상이 자세히 담겨있다. 이 망명일기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김대락의 매제이며 향산 이만도의 아들인 이중업은 파리장서(1919년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려고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주도한 사람이다. 그의 누이는 여성으로서 안동에서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김락 여사다. 또 백하를 모시고 만주로 간 아들 월송(月松) 김형식은 종형인 김만식·김정식 등과 함께 고모부인 이상룡을 끝까지 도우며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협동학교의 교사로 활약하기도 한 그는 하얼빈 취원창에서 민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사회주의 독립운동에도 가담해 1944년에는 조선독립동맹북만지부 책임자를 맡기도 했으며, 광복 후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때는 임시의장 자격으로 사회를 봤다. 그는 북에 살면서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해 금강산으로 유폐되었다가 1950년 미군이 진군할 즈음 금강산에서 자결했다고 알려진다.

내앞(안동시 임하면 천전리‘川前里’) 출신 중 일송 김동삼을 빼고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역사를 논할 수 없다. 그는 서간도 망명 후 석주의 일을 돕다 독립군 비밀군영인 백서농장을 건립했다. 그 후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으며 경신참변 후 흩어진 독립군을 모아 통의부를 창설, 총장에 올랐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 대회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했고, 전만통일회의 의장으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1927년 김좌진·이청천 등이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합해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최했을 때 그는 의장에 선출됐다. 김동삼은 '만주의 호랑이'로 불릴 만큼 활동 반경이 넓었다. 그러나 그는 1931년 사돈 이원일과 함께 왜경에게 붙잡혀 향년 60세에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나라 없는 몸 /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 지켜보리라.” 일송의 주검을 거둬 5일장을 치른 만해 한용운은 일송의 유언을 보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일송의 맏며느리 이해동 여사가 쓴 '만주생활 77년'이라는 수기에는 일송을 비롯한 안동인들의 항일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안동 임청각(보물 제182호)은 석주 선생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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