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한 식민지 농촌에 새싹 심듯
안산 샘골의 상록수 주인공 최용신 길러내며
무지한 농촌을 깨우친 힘은
골수 깊은 나라 사랑 정신일세

열세 살 소녀 단식하며 학교 가길 소원하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두 손 든 딸
장차 커서 조국의 기둥 되었네

어떠한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늘 푸른 소나무와
곧은 대쪽 닮은 정신으로 만든 송죽회
그 속에서 겨레 혼 겨레 넋
담아내며 키워 낸 인재

삼천리 방방곡곡 새순 돋듯 퍼져 나가
광복의 푸른 숲
너른 그늘 드리웠다네.

 

▲ 대구감옥소에서 나온 뒤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들(1922). 뒷줄 오른쪽이 황애시덕 (사진제공 연동교회)

● 황에스터(黃Esther, 애덕(愛德)·애시덕(愛施德): 1892.4.19~1971.8.24)

황 에스터는 황애덕이라고도 불리는데 그의 어머니가 여섯째 딸 신덕을 낳고 사흘 동안 후산(後産, 해산 한 뒤 태를 낳음)을 못해 사경을 헤맬 때 읍내의 미국인 홀 의사가 왕진을 와서 순산을 도운 인연으로 온 집안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때 아기의 세례명은 펄이었고 확실, 간레(가운데)로 불리던 넷째 딸은 황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순전히 동생의 난산으로 기독교에 입교하는 바람에 붙은 이름이었다. 한자로는 예수다(禮須多) 또는 애시덕(愛施德), 애덕(愛德)으로 불렸다.

1904년 작은 두 동생은 학교에 보냈으나 13살이던 애시덕은 열 살 넘은 처녀라고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언니들은 이미 혼인했고 혼자 남은 애시덕은 아버지께 학교에 보내달라고 단식 투쟁을 벌여 결국 정진소학교 상급반으로 편입할 만큼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소학교 졸업 뒤 곧 이화학당에 들어갔고 그 뒤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북돋우는 교육에 전념했다. 3년 뒤 동료교사 김경희와 교회 친구 안정석과 더불어 비밀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고, 애국사상이 깊은 학생들을 엄선하여 정신교육을 강화시키고 송죽회의 자회(子會) 설립을 지도하면서 동시에 군자금을 마련하여 중국의 항일독립단체에 송금하였다.

이후 1918년 선교사 홀(Hall, R. S.)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마침 유학길에 남대문 역에서 김마리아를 만나 평생 독립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김마리아는 동경여자학원에 다녔다. 의기투합이 된 두 사람은 현덕신· 송복신 ·정자영 등과 학흥회를 조직하여 유학생 사이에 배일사상을 북돋우고 애국심을 높이는 데 노력하였다.

1919년 2월 6일의 동경유학생회에서 남녀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독립운동에 여성도 참여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을 열변하였으며,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주동학생으로 경찰에 잡혔다가 풀려나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여성대표를 파견할 임무를 띠고 몰래 입국하여 활약하였다. 여성대표로는 신마실라(申麻實羅)가 선정되었는데, 그의 여비 마련을 위하여 노파·일본 여인 등으로 변장하여 지방 연고지를 찾아 모금을 하였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가는 가운데 3월 19일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8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여성계의 독립운동이 부진함을 개탄하던 김마리아와 더불어 애국부인회를 확대 재조직하고 총무직을 맡아 뛰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로의 군자금 송달 등 애국부인회의 실상이 일본경찰에 들켜 애국부인회 임원이 모두 검거되는 사태를 맞았고 이때 대구경찰서에 다시 수감되었다.

재판 결과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동포 죄수들을 선도 계몽하였다. 형기 1년을 남기고 가출옥한 뒤,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고, 졸업 뒤 모교의 사감 겸 교사로 봉직하였다.

1925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석사를 받고, 1928년 귀국한 뒤 이듬해 4월 감리교여자신학교 농촌과장으로 취업하였다. 겨울방학 때는 학생 두 명씩 짝을 지어 일선 곳곳에 농촌계몽부대를 보내 실태조사를 시켰으며 여름방학에는 수안, 수원, 신계, 곡산, 예산으로 책임자를 보냈다. 그 유명한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인 최용신이 수원의 샘골로 파견된 것은 바로 이때다.

광복 뒤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하여 여성문제 타결에 노력하였으며, 6·25 한국전쟁 중에는 마침 미국에 있었으므로 미국의 12개 주를 돌면서 구호품을 모아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에 귀국하여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한 뒤 전쟁미망인과 고아를 위한 기술교육을 하였으며 1967년 3·1여성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서 활약한 여성동지들의 힘을 모으는 등 여성의 권익과 발전에 앞장선 삶을 살았다.

-네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성불성은 불문이다.
-선악간에 내가 심은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거둔다
-이상이 위대할수록 그 실현의 때는 멀다
-밀 한 알이 떨어져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라는 생활신조를 황애시덕 여사는 평생 가슴에 새기며 성실한 삶을 살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불멸의 독립운동 여류 거물 “황애시덕”
 
“김마리아, 朴仁德, 黃愛施德 이 세 분은 1919년을 기억하는 이 땅 인사에게 가장 불멸의 기억을 남겨준 여류거물들이다. 그 중에 黃愛施德 여사는, 작년 봄에 米國 컬럼비아 대학의 학위를 엇고 맨처음으로 귀국하엿고 이제 朴仁德 여사마저 또한 만인이 讚仰하는 속에서 비둘기 가치 어엽분 자태를 이땅 하늘 우에 나타내엇고 ― 오직 亞米利加의 이방에는 김마리아가 혼저 남어 잇는 터이나 그도 또한 不遠한 장래에 넷날의 둥수리로 뛰어올 터이니 엇전지 우리들은 시집 보내엇든 딸 삼형제가 한날 한시에 꼿가마 타고 친정으로 도라와준 듯 한끗 반갑다. 이 세 閣氏는 말하자면 반도의 애인이엇든 까닭이다. <중략>

여성단체로 가장 큰 것을 곱자면 사회운동단체로 槿友會가 잇고 불교측으로 불교여자청년회가 잇고 그리고 기독교측으로 청년회연합회가 잇다. 이 기독교여자청년회연합회는 그 사무소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 안에 두고 13道 각지의 여자청년회를 통할 運轉하고 잇는데 그의 최고 책임자가 우리가 지금 말하려는 黃愛施德 씨다. 亞米利加의 유학을 마치고 도라온 것이 작년 이른 봄. <중략> 그의 절친한 동지는 아직 亞米利加에 가 잇는 김마리아와 그리고 10월 6일 서울에 도라온 朴仁德 여사다. 이제 朴여사마저 여자청년회연합회를 근거 삼고 일하겟다하니 두 손벽은 마저질 것이다.
 
黃愛施德 씨에는 特長이 잇다. 德이 잇는 것과 조직의 智略이 놀납게 잇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功을 급히 하지 안고 퍽으나 겸손한 천성을 가지고 잇다. 뒤에서 모든 일을 계획하여 그 일이 성공되면 그것은 표면에 내세웟든 그 사람의 功에 전부 돌려버린다.

勇將이 不如智將이오 智將이 不如德將이란 말도 잇지만 黃여사는 勇과 智도 가지고 잇스나 남에게 제마다 업는 德까지 마저 가지고 잇다. 그것이 今後의 大成을 기대케 하는 소치다.

또 「올가나이자」로서 그의 才華을 볼 것은 이미 10년 전의 경험에서 알엇다. 그도 사상상 색채를 따진다면 민족주의자에 인도주의 색채를 다분히 가젓다 할 것이다.

그는 금년 봄에 결혼하엿다. 들니는 말에 부군은 저보다 나이 적다 하는데 올드 미쓰를 청산하신 뒤부터 전보다 활동하시는 품이 더욱 힘잇다고 전하니 다행한 일이다. 아무튼 昨今 兩年 사이에 조선 녀성사회에는 유력한 일꾼 두분을 마지하엿다. 고향은 平壤, 올에 서른다섯.   

- 삼천리 제3권 제11호, 1931년 11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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