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늘 떠오르는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다. 기자노릇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해가 바뀌어 설 명절이 다가오고 있던 때였다. 길가에는 동네마다 ‘척사대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선배 기자로부터 ‘00동 척사대회’를 취재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척사대회가 열린다는 한 경로당을 찾았다.

속으로 ‘척사대회가 뭐하는 거지?’라고 궁금해 하면서도, 당연히 ‘정초에 동네의 액운을 몰아내는 어떤 의식 같은 것-척사(斥邪)’ 이겠거니 여겼다.

동네 농악대가 한바탕 흥을 돋우고, 걸어놓은 가마솥에서는 떡국이 끓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경로당 안에서는 윷놀이가 한바탕 벌어져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좀처럼 동네의 액운을 쫒아낼 것 같은 척사대회는 시작되지 않고 짧은 겨울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마음에 경로당 총무 어르신에게 “척사대회를 취재해야 되는데, 혹시 언제쯤 시작되나요?”라고 물었더니, 그 어르신은 “벌써 다 끝났는데”라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보니, 척사대회는 조금 전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그 윷놀이였다. 척사(擲柶)는 던질 척, 윷 사.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바로 내 눈앞에서 몇 시간동안 계속됐던 척사대회를 몰랐다니.

그 이후로, 척사대회라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화가 난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고 정감있는 ‘윷놀이’라는 말을 놔두고 왜 굳이 척사대회라는 어려운 말을 썼을까?

요즘 보도자료에 어디어디서 척사대회를 한다는 내용이 많아지고 있다. 척사대회가 윷놀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젊은이들이 서양의 민속에 더 익숙해져 가는 마당에 쉬운 ‘윷놀이’라고 하면 좋을텐데.

우리의 민속놀이인 ‘윷놀이’는 정초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에 가정이나 마을에서 여럿이 함께 즐겼다. 한 뼘 남짓한 길이의 곧고 둥근 막대기를 둘로 갈라서 만든 4개의 윷으로 등과 배의 경계선을 얼마간 깎아내서 배를 약간 불룩하게 만들어 윷이 굴러서 엎어질 듯하다가 젖혀지며, 젖혀질 듯하다가 엎어지는 변화를 가져온다.

윷가락은 엎어지거나 젖혀지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가지므로 4가락을 종합하면 5가지의 경우가 생긴다. 셋이 엎어지고 하나가 젖혀질 때 '도', 둘이 엎어지고 둘이 젖혀질 때 '개', 하나가 엎어지고 셋이 젖혀질 때 '걸', 넷이 다 젖혀졌을 때 '윷', 넷이 다 엎어졌을 때 '모'이다. 도는 돼지[亥], 개는 개[犬], 걸은 양(羊), 윷은 소[牛], 모는 말[馬]을 가리킨다고 한다.

굳이 ‘척사대회’를 할 이유가 없다면 올해 정월대보름에는 ‘윷놀이’를 해 보자. 한민족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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