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예총 회장
수원은 정조가 계획하고 정성을 쏟아 만든 정조의 개혁도시다. 화성 건물 하나하나마다 정조는 깊은 애정을 담아 이름을 짓거나 친히 편액 글씨를 썼다. 또한 당대 최고의 명필과 명신들에게 쓰도록 했다. 수원에는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보다 어필과 명필의 편액이 많다. 이 또한 수원의 자랑거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에 위치한 ‘팔달문’ 편액 글씨는 누구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우리 고유의 단정한 해서체로 장중하고 힘차게 쓴 편액이다.

성문건축의 백미인 팔달문이 지붕하부 서까래 일부가 떨어져 나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고 문루 대들보가 기울어졌다. 그대로 방치할 경우 장기적으로 붕괴위험이 있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진단에 따라 해체보수공사가 그간 이뤄졌다. 전통목조건축물은 시간이 경과되면 목부재의 갈라짐, 비틀림, 박리 등으로 변형이 되기 쉽다. 1795년 축조이후 몇 차례의 지붕과 옹성보수를 제외하고 근본적인 해체보수는 220여년 만에 처음이다. 원형을 보존하면서 남아 있기까지는 창건이후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건물의 상태를 살피고 사소한 손상도 적절한 시점에 보수를 했기에 그렇다.

국비70%, 도비15%를 지원받아 총공사비 47억1천여만 원을 들여 근 3년 만에 해체보수 및 보존처리공사를 마치고, 지난 3일 팔달문 중건(重建) 준공식을 가졌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축하했다. 염태영 시장은 ‘화성과 함께 축조돼 220여년을 시민과 함께 살아온 팔달문은 수원의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팔달문은 단순한 중건이 아니라 시민의 긍지를 살리고 수원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역사(役事)다. 사적과 유물을 보존할 의무가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있다. 더욱 자랑스럽게 팔달문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지켜가야 한다. 팔달문을 비롯한 화성을 올바로 아는 일도 중요하다. 거기엔 숱한 역사 이야기들이 주저리주저리 열려있기에 그렇다.

팔달문은 삼남지역에서 서울로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다. ‘돈과 곡식과 군사가 모이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 있네.’라는 팔달문의 상량문이 말해주듯, 재화와 인물이 모여드는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문이다. 실제로 화성축조이후 이제껏 수원상권의 중심지다. 모든 문의 편액에는 그 문의 의미가 들어 있다. 팔달문은 팔달이라는 산 이름을 따서 문호(門號)로 삼았다. 정조가 이름을 짓고 조선의 ‘왕희지 집안’이라고 칭송받던 명필 송하 조윤형이 썼다. 그는 문예군주 정조가 제일 선호하던 서예가다.

『홍재전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팔달은 사통과 팔달을 뜻한다. 사통팔달이라는 이상과 현실을 아우르고자 하는 정조의 꿈이 담겨있다.『화성성역의궤』에서도 명시된 사통팔달은 사방팔방의 바다와 육지에서 모여드는 배와 수레의 출입 왕래처라는 사회?문화활동과 정치?경제적 뜻도 담겨져 있다. ‘팔달문’ 편액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수많은 편액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유려하다.

팔달문 중건을 기리기 위해 ‘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라는 주제로 준공기념 특별기획전이 수원박물관에서 오는 7월21일까지 열리고 있다. 팔달문 축조이후 중건까지 ‘팔달문의 생애’를 조망하는 시의적절한 전시다. 보물 제402호 팔달문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도록은 그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공사비용은 전부 임금이 사사로이 지출했으니/ 진실로 임금의 밝은 덕을 베풀었고/ 부역은 농사 때를 빼앗지 않았으니/ 모두 선대의 백성들을 감싸주는 아름다운 덕이라 하네/ 감히 상량의 노래를 본받아/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땅의 신령이 몰래 붙들어 주고/하늘의 아름다움 많이 이르게 하소서/ 산과 시내의 안과 밖은/ 큰 나라 당겨서 빛이 있게 하고/ 기둥과 서까래는 둥그렇게 높이 솟아/ 오래오래 내려가서 견고하게 되소서.’ 문루 상층 측면에 걸린 상량문처럼 팔달문이 영원토록 견고하길 염원한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