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예총 회장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어김없이 꽃이 핀다. 겨우내 움츠렸던 예술계도 기지개를 편다. 전시가 활발해지고 공연이 줄을 잇는다. 예술인들은 창조와 소통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존재다. 그들은 성벽을 넘어 세상을 여행한다.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불규칙과 돌발성은 짜릿한 영감을 준다. 이젠, 예술발전을 위해서는 비평의 바람직한 역할과 기능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이한 예술문화풍토 구조 속에서 모든 분야에 걸쳐 비평의식이 고갈되어 가고 있어 안타깝다. 탄탄한 수원예술발전을 위해 비평정신을 함양시켜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옳소’와 ‘박수’만 있는 풍토로는 수원예술이 설 자리를 점점 잃게 된다. 더 많은 어려움도 닥칠 수 있다. 바른 평론을 통해 ‘수원예술’을 새롭게 재창조하고 재탄생 시켜야 한다. ‘비평의 부재와 그 정신의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에 그렇다. 

‘최상의 평론은 또 다른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예술작품에 대한 평론가의 분석과 평가가 그 예술작품의 창조적인 근원을 제대로 짚어냄으로써 시민관객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게 된다는 뜻이다. 좋은 평론은 시민관객에게나 예술인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예술인은 평론을 통해 자신의 창작관(創作觀)을 가다듬게 된다. 반면 관객은 정말 좋은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평론은 창작에 업혀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창작자의 옆에서 격려하고 고무시키는 동반자 이상의 것이다. 문학, 미술, 사진 등 시각예술과 음악, 국악, 무용, 연예, 연극 등 공연예술에 심도 있게 평가하는 평론가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물론 예술평론가의 몫은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시민관객은 다양한 감정 상태에서 전시나 공연예술을 보러 온다. 그 공연을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본다. 기대하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할 경우 실망을 안겨 주게 된다. 관객은 한결같이 최상의 예술을 요구한다.

관객에게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경험’을 제시해야 한다. 가능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 그들은 일생동안 누적된 연상(聯想)과 기억과 함께 새로운 경험과 의미를 연결하는 습관을 가진다. 예술작품을 과거의 경험에 얽매이지 말고 봐주기만 기대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을 정서적으로 자극시키거나 유쾌한 감각적인 경험을 제시하여 지적인 근거를 주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예술인의 의무다.

객관적인 가치측정기준이 없으면 보장된 결과를 위해 따라야 할 비법이나 절대적인 원칙이 없다. 비평과 평가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려면 남의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 작품을 관객의 관점에서 생각한 다음, 의미를 명료하게 하여 다음 공연을 위해 재구성할 기회를 갖는다.

시민들은 공연을 보러갈 때는 감동을 담아올 넉넉한 마음 하나뿐이면 족하다. 그냥 본 대로 느끼고 감동하면 된다. 어떻게 감상하는 지 잘 몰라서 공연보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공연장을 찾을 때 꼭 정장을 입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좋은 공연을 감상하러 마음먹은 만큼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이면 더욱 좋다. 공연장에서 만큼은 ‘모두가 특별해지고 싶은’ 그들의 여유가 공연 분위기를 확 달라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을 얄팍한 재미로 몰아가면서 진정한 예술, 진실한 예술, 감동의 예술, 위대한 예술을 호도한 것은 아닌지를 자성해야 할 때다. 발표된 작품에 대해 엄정한 평을 듣는다는 것은 예술 활동이 많아진 오늘날 쉬운 일은 아니다.           

현대 예술의 특징인 창작자와 향수자가 일체화하는 경향 속에 이미 관객, 청중, 독자들의 상당수가 비평가의 수준임을 감안할 때 오늘의 우리 평론은 보다 전문화되어야 할 절실성에 직면했다. 청마의 해, ‘인문학도시-수원예술’을 옹골차게 수확할 수 있도록 전시나 공연예술 분야의 평론을 열심히 가꿔가야 한다. 훌륭한 예술은 비평 속에서 이루어진다. 평론가는 ‘예술’을 위하여, ‘예술인’을 위하여, ‘예술단체’를 위하여 바른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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