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봄, 경기도 광주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을 처음 찾았다. 위안부 기념관 기공식을 겸해 찾았던 인연으로 이후 매년 몇 차례 이 시설을 찾곤 한다. 때때로 일본의 지인이 한국을 방문해 관광 안내할 일이 생기면 "한국의 시골풍경 구경하자"며 나눔의 집을 갔다. 그것은 일본인에게도 기회였다. 근대 한일간 역사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 한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뿐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을 싫어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그곳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서울 종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설치됐다. 매주 수요일마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일본을 향해 피맺힌 절규를 해온 위안부 할머니들의 집회를 기념한 동상이다. 다소곳이 의자에 앉은 단발머리 소녀는 제국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겨울이면 시민들이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소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 소녀상이 수원에 설치된다고 한다. 독도영유권 주장을 필두로 한 일본의 제국주의 망상에 대항해 수원의 청소년들에게 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줄 소녀상이 건립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어디에?' 라는 질문이 남는다. 들리는 말로는 소녀상을 시청 건너 올림픽공원에 설치하는 방안이 유력한 듯 하다.
소녀상의 역사성과 올림픽공원 부지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 편의적으로 수원시 소유 부지의 한 곳을 정하는 것이라면, 그 위치를 반대한다. 그리고 심의위원들께 다른 곳을 제안 드리고 싶다. 무릇 상징물은 한번 설치하면 그 위치를 옮기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만큼 어느 곳에 어떤 상징물을 설치할 것인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필자는 팔달문 인근의 한데우물터나 버스 정거장인 백병원 등의 위치를 제안하고 싶다. 한데우물은 근대 수원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일제시대, 현재 중앙시장의 상권을 일본인에게 내어주고 우리 조상들은 중심지에서 밀려난 공간에 살아야 했다. 한데우물이 그 대표적인 지역이다. 팔달산에 판잣집을 짓고 살던 많은 우리 조상들은 한데우물가에서 물을 뜨고, 빨래를 하면서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서로서로 달래야 했다. 그 옆에 소녀상을 세워야 상징성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을까. 또 행궁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수원의 근대문화유산을 소개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

 다른 위치를 소개하라면 수원 최초로 3ㆍ1만세 운동이 시작된 곳을 추천하고 싶다. 현재 남문 버스정거장이 위치한 백병원 앞이 그곳이다. 수원의 만세운동은 당시 남수동에 살던 기생들이 중심이 돼 처음 시작됐다. 소녀상을 그곳에 세우면 그 역사성과 의미가 더욱 극대화 될 수 있다. 이처럼 역사성을 지닌 공간을 배제하고, 수원의 근대사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올림픽공원에 소녀상을 세우려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해야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몇 달 앞두고,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갈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일본인 도예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그는, 조금이라도 좋으니 백두산 흙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백두산의 흙과 일본 후지산의 흙, 한국 지리산의 흙을 합해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도자기를 굽고 싶다는 이유였다. 여러 눈을 피해 흙을 조금 구해오자, 흙을 받아가기 위해 일본인 도예가가 한국에 왔다. 그 흙으로 도자기를 빚어 월드컵에 참석하는 국가 정상들에게 선물로 보내겠다며 몇 번에 걸쳐 고마움을 표시했다. 작은 의미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예술가 정신이 바로 오늘 일본문화를 이끄는 힘이 아닐까 한다.

 많은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조만간 소녀상이 수원에 건립될 예정이다. 소녀상이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의미 있는 곳에 세워져 많은 시민들이 목도리를 나눠주고, 많은 학생들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근대역사를 알 수 있는 상징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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