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언제부터인가 글로벌 리더십이라는 단어가 마치 학교 교육의 표준인양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구촌이 좁아진 느낌이고 세계를 누비는 데의 교통수단과 각종의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현대를 보며 그럴 듯 하기도 하다. 학교 교육이 세계를 움직일만한  거대한 지도자를 잘 만들어 낸다면 그것같이 좋은 교육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 교육을 볼 때 진정한 리더를 기르기에는 토양과 기능이 그렇지 못함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대학의 입시정책은 검증은 고사하고 우리 학생들을 안절부절하게 만든다. 왜 그렇게 앞을 내다 보지를 못할까?

정치가 교육을 힘들게 한다. 마치 정치를 전문으로 하는 그들은 자기들이 교육의 전문가인양 착각 속에 사로 잡힌다. 하다못해 학교를 하나 짓고 교명을 정하는데도 교육의 전문가보다는 정치가 틀림없이 개입한다. 아파트 하나 들어서면 특목고 유치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자기의 치적으로 자랑한다.

그렇게 되니 정작 주인이고 주체인 학생의 의견이나 입장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어른이라는 존재감의 리더십이 무엇인지 헷갈려 착각 속에 빠져든다. 모양과 무늬만 갖춘 리더십은 그 수명은 오래 못 간다. 소위 말하는 세상적인 출세의 자리나 명예, 권력을 가지면 그게 곧 리더십이니 지도자니 함부로 말한다. 배려와 나눔의 실천없이 리더십이 가능할까? 결국 타락해 가는 양심과 도덕심의 회복이 문제이다. 

도덕심은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한 행동이며 삶의 철학이다. 리더십은 교과서만을 통해서는 배워지질 않는다. 함께 하는 동아리활동, 자원하는 마음의 봉사활동, 열린 토론회, 특히 자기주도적인 체험활동 등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학교 생활기록부의 기재와 관계없이 그 이상의 조건이 붙지 않는 활동을 권장하고 싶다. 요즈음은 봉사활동을 해도 먼저 몇 시간 짜리인지를 물어 본다. 부모는 오히려 학생보다도 더 민감하다. 그저 매일 논쟁거리가 혁신고니, 자율고의 폐지니 등등의 논리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교육의 핵심적인 커리큐럼을 어떻게 정예화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체험적인 교육의 방법은 오랜 동안 기억되고  습관화 된다. 

왜 학생회는 그 구실을 못할까? 참으로 안타깝다. 허수아비 회장이나 임원이 되지 않게 학교가 반성해야 한다. 어린 아이가 남을 생각하고 우선시하던 행동이 어느 날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변해 버린다. 교통법규의 준수나 좌측 통행, 남을 돕는 일에 앞장 서는 일 등 너무도 잘하던 아이가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변해 버린다.

여기에는 철저한 부모의 역할이 한몫을 한다. 부모나 어른이 달라지지 않고 아이들이 달라지기를 바랄 수 있을까? 경쟁하여 이기기만을 강요하는 교육은 진전한 리더를 길러낼 수 없다. 성공담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실패담도 담력있게 말할 수 있어 박수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앞장서서 무조건 끌고 가다가는 어느새 지쳐 자빠진다. 왜 가야 하는지? 목적은 무엇이며 목표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만들어 내는 데에는 설득력과 논리가 필요하다. 물론 과정과 방법까지도 논쟁을 통해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철저한 반대논리도 채택된다. 다름과 틀림이 철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반대파의 제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학교에서의 학업성취도상 못지 않게 리더십이 남다른 학생에게 더 많은 격려와 상을 주어야 한다.

내년엔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3만 달러와 인구 5000만 명을 동시에 갖춘 이른바 30-50크럽에 가입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7번째로 가입이 된다. 그러나 웬지 씀쓸하다는 느낌은 나만 갖는 것일까? 소득과 인구 못지않게 진정한 리더를 만드는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유엔사무총장을 만들어 낸 국가의 저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어른들이 앞장서는 본을 보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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