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을 통해 시민을 서로 분리, 고립시키는 모든 정치적 질서, 그리고 의견의 공적 교환을 차단하는 정치적 질서는 폭력에 근거한 통치로 퇴보한다. 그러한 정치질서는 권력의 유일한 존재 근거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파괴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언론에만 돌 던질 수 없다

언론의 신뢰가 추락하고 있다는 건 이미 오래된 얘기여서 새삼 의제로 삼기가 민망할 정도다. 싸움질만 해대는 정치권에 못지않게 언론도 그간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신문과 방송으로 나뉘어 싸우더니, 이제는 종편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라는 구도까지 더해져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구차하게그러잡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던 차에,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기점이 될 세월호 사건은 언론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신뢰 전반에 큰 균열을 냈다. 단견이길 바라지만, 그균열은 쉽사리 메워질 것 같지가 않다.

최근 각종 조사에 의하면 정부에 대한 신뢰는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추락했고, 세월호 취재보도를 둘러싸고 터져나온 국민들의 질타와 분노는 많은 기자들에게 무력감과 자괴감을 넘어 트라우마를 안겨줄 정도로 맹렬하고 파장이 컸다.

세월호 사고 직후 SNS에서는 "배 안에 생존자가 있다"는 유언비어가 급속히 퍼져 나갔다.<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어찌 보면 불신 창조의 주범으로 언론 만을 탓하기는 뭔가 적절치 않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크고 작은 거짓말과 사기, 온갖 부정부패가 이렇게도 많은 사회인데, 신뢰를 저버리고 해쳐도 떵떵거리며 사는 이가 어디 한둘이며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안 통하는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한국사회 아니던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손해 보는 일임을,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씁쓸하고도 처절하게 깨닫는 게 한국 사람의 인생 수업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는 신뢰의 대가로 멀쩡한 목숨을 수백씩 앗아가기까지 하는 게 바로 우리가 이발을 딛고 있는 한국 사회다.

유병언의 얼굴에서, 선장의 얼굴에서, 해경의 얼굴에서, 그리고 정치인과 대통령의 얼굴에서, 문득문득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내게만 한정된 경험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언론만을 손가락질하는 것은 뭔가 '공정'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사회라는 장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론을 몰아세우기 전에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하며 언론의 신뢰를 문제 삼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촘촘하고도 거대한 불신의 구조와 역사를 돌아보고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신뢰 수준은 매우 낮다. 과거에도 신뢰가 낮은 수준이었지만, 최근 한국 사회가 경험한 일련의 사건, 사고들은 극도의 불신을 가져왔다.

최근 언론에 보도됐던 몇 가지 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세계가치관조사에서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 수로 평가한 신뢰도에서 한국은 100명당 26명에 그쳤다. 스웨덴 60명, 독일 45명, 러시아 28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적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신뢰성, 남을 믿는 정도로 평가한 사회자본 점수에서 한국은 66위였다. 1위는 노르웨이, 2위는 뉴질랜드, 미국은 9위, 일본은 23위였다(출처:동아일보 9월 2일자).

아무도 못 믿는 사회

다음으로 5월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했던 OECD 국가들의 사회자본지수 조사는 우리나라 신뢰 수준을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사회자본지수란 사회자본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상대적 경쟁력을 지수화한 것으로서, 사적 사회자본에는 사적 신뢰, 사적 배려, 사적 참여가, 공적 사회자본에는 공적 신뢰, 공적 배려, 공적 참여 등이 포함된다.

OECD 평균은 5.80, 우리나라의 사회자본지수는 5.07이다. OECD 32개국 중 29위, 즉 끝에서 세 번째다. 사적 사회자본은 5.40점(OECD 평균 6.22점), 공적사회자본은 더욱 낮아 4.75점(OECD 평균 5.37점)에 그쳤다. 더욱이 정부와 사법시스템 등 공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31위 수준으로 나타나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드러났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사적 신뢰, 즉 친척이나 친구에 대한 신뢰가 OECD 32개국 중 최하위권을 기록했다는 점이다(출처:이데일리 5월 25일자).

이는 과거 공적 부문에 대한 신뢰는 약하나 사적 부문의 신뢰는 강하다는 조사 결과와 배치되는 것이어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의 경험과 사회 흐름이 반영된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할 것이다.

과연 누가 한국 사회의 신뢰를 세계 최저 수준으로 만들었는가? 배운 자는 배운 자대로, 돈 있는 자는 돈 있는 자대로, 힘 있는 자는 힘 있는 자대로, 그리고 소시민은 소시민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쉽사리 크고 작은 규칙을 어기며 살아온 우리 모두가 공범자이며 변화를 위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각성과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정부 등 8개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8.1%에 불과했다. 

2013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수용자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미디어별 기사·뉴스 및 시사보도 신뢰도는 5점 척도(1점 '전혀 신뢰하지 않음', 5점 '매우 신뢰함') 기준으로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이4.13점, 보도전문채널 3.84점, 종합편성채널 3.72점, 전국종합신문이 3.65점, 포털뉴스가 3.58점 순이었다.

'언론 전반'에 대한 신뢰도는 3.40점으로 나타나(출처:'2013 언론수용자 의식조사'), 어쨌든 보통 이상의 그리 나쁜 성적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최근의 양상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기에 그야말로 '신뢰'하기 어려운 수치라고 보는게 합당하다. 올해 같은 조사가 실시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지난 8월 실시된 시사저널과 미디어리서치의 조사 결과는 부분적으로나마 그간의 변화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전문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 매체'는 한겨레 27.5%, 2013년 27.6%), KBS 25.8%, 2013년 38.7%), JTBC(20.5%), 경향신문(19.6%, 2013년 18.8%), 조선일보(15.0%, 2013년 13.1%), MBC(9.7%, 2013년 14.7%), YTN 9.4%, 2013년 9.4%), SBS(8.7%, 2013년 12.1%) 등의 순서로 나타났다.

지난해 위였던 KBS는 무려 13%p 가까이 떨어졌고, 대신 순위에 없던 JTBC는 20% 넘는 신뢰도로 3위로 약진했다. MBC는 5%p 떨어져 한 자리 수의 신뢰도를 보이고 있다. 묘하게도 지상파 3사의 하락폭이 그대로 JTBC로 옮겨간 모양새다.

'옳은' 언론이 필요하다

또한 지난 8월,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의 신뢰도 조사 결과는 8개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 수준을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주는데 여기에 언론이 포함되어있다.

전반적으로 신뢰도가 대단히 낮은 가운데, 시민단체를 가장 신뢰한다는 응답이 22.4%로 가장 많았다. 정부는 14.3%, 언론은 8.1%, 종교단체는 5.3%, 군대 3.9%, 법원 3.1%, 국회 2.7%, 검찰 2.5% 순이었다(출처:경향신문 9월 1일자).

언론을 믿는다고 한사람은 열에 한 명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난 2006년 '민주주의와 언론의 신뢰'라는 논문에서 나는 '옳은' 언론과 '좋은' 언론의 개념을 정리하고 우리나라 언론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더욱 시급히 필요한 것은 '옳은' 언론, 즉 언론의 실천 규칙 또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언론의 신뢰 위기는 갈등의 요소와 지점이 복잡다기하게 결합, 분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신뢰 위기이며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갈등 자체를 없애려하기보다는 갈등에 접근하는 방식과 절차가 중요하게 된다.

그렇기에 '무엇을' 보도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가 고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보도 내용의 차별성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 내용을 확보하고 기사로 만들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되어야 한다. 취재보도에서 적절한 절차와 윤리가 함께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 불었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근본적으로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방증하는 것이며, 정부는 물론 학교나 언론이 정의에 대한 실천적 제시를 제대로 해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언론은 이에 동의할것인가? 아마도 한겨레는 한겨레대로,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대로, 우리 사회의 정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들이 무엇보다 자기네 독자들의 이익과 관점을 충실히 대표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정치권이나 사주의 이익이 아니어야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각자가 바라보는 정의가 다르다는 점이다. 개인이든 언론이든, 서로 다른 입장과 가치관을 인정하고 규칙을 지켜나갈 때 진정한 공론장이 형성되고 다원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진작된다. 이것이 바로 '좋은' 언론보다는 '옳은' 언론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근거다.

개인 차원의 노력만으론 역부족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지배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지배권력은 정치권이 될 수도 있고, 사주가 될 수도 있다. 특히나 호시탐탐 언론을 손에 넣으려는 정치권은 언론 자유의 가장 큰 위협요소다.

이념이 같다고 해서, 지향이 같다고 해서 경계의 끈을 늦추었다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는 것을, 당장은 얻어가는 게 있는 듯해도 그 유효기간이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지켜봐왔다.

오늘의 정치 상황과 언론 여건은 2006년보다 대폭 후퇴했다. 무엇이 공공선이며 추구해야 할 가치인가 하는 이념과 관점의 문제를 떠나 보도의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을 수없이 목도한다.

지배권력의 영향 아래 있는 언론은 '무엇을' 보도할 것인가 하는 것 역시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제대로 보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진실의 구성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 기자라면 모를 수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언론의 신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역시나 강조할 것은 언론의 가장 기본적 역할인 감시와 비판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사회의 각종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끊임없이 살피고 오작동의 기미가 보이는 것을 알리는 것이 언론이다.

힘 있는 사람과 집단이 그 권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않는지 철저히 감시하고, 그러한 사실이 있으면 그 어떤 위협이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제대로 보도하고 비판함으로써 사회를 바로잡는 기능을 하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보도를 통해 사회는 오류를 수정하고 없는 자, 약한 자들이 살아나갈 공간과 기회를 적게나마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신뢰사회의 기틀이 단단하게 잡혀 나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자 윤리를 고양하고 기자 정신도 회복해야 한다. 기자 교육의 방법과 내용도 개선되어야 한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에 살아가기 어렵다 해도, 굶어죽을지언정 곁눈질은 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근성과 자부심이 언론을 살리고 나라를 살린다.

기사가 아닌 것을 기사처럼 쓰지 말고, 기사가 되어야 할 것을 어떤 이유로든 누락시키지 말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과한 욕심을 부리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낙하산 사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배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기자 개인 차원의 일들은 큰 의미가 없다.

매일매일 시청률로 후려치고 인사고과를 하는 조직에서 기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언론사가 이익을 좇는 회사로서의 본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한 직장인으로서의 기자는 활동 반경과 수위가 대폭 줄어든다.

'기자놈'과 '기자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언론과 기자를 가려서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언론을 제도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으로 나누어 보자는 것이며, 그렇게 분리해서봐야 할 만큼 오늘날 우리의 언론 상황이 파행적이고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와 더불어 '기자놈'과 '기자님'을 구별하는 일도 시급하고 중요하다. 언론사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기자놈들이 일부 있다. 기자놈은 정치권과 결탁하여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과 가치를 저버림으로써 치명타를 입히기도 한다.

또 독자나 시청자보다는 취재원을 우선시하면서 사익을 도모하고 나아가 후일 '기자 이모작'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기자놈도 있다. 사내정치에 몸담고 줄서는 일에 정신 팔린 기자놈도 있다.

시청률을 핑계로 알맹이 없는 기사를 선정적으로 포장하기도 하고, 문제가 있는 관행적 보도를 그대로 답습하기도 한다. 언론이 너나없이 다 같이 망해가는 판에 자사이기주의에 목매는 안타까운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주가 아니기에, 그런 기자놈들이 우리 언론인의 주류가 아니기에, 이 어려운 환경에서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그 어떤 직업보다 힘들게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자님'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상처를 함께 어루만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한국 사회의 기자들을 신뢰하며, 그들이 일구어가는 언론의 미래에도 기대를 가지고 있다.

김세은 /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글은 월간 <신문과 방송> 10월호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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