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 회장
지금부터 70년 전 우리 민족은 찢기는 가슴으로 살아왔던 일제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나누어 군정에 들어갔고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역사 속에 또 시간이 흘렀다.

남북의 분단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고 오늘날까지 총부리를 서로 겨누며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은 물론 이산가족의 가슴 아픈 현실을 보듬고 온 국민은 오늘도 진정한 해방인 남북통일을 갈망하고 있다.

오는 8월 15일이면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많은 행사들을 개최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기도와 수원에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숨겨진 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있다. 그 분들 중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추서되신 수원출신 임면수(1874~1930)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수원시청 앞 88공원에 세워진다고 한다.

임면수 선생은 1874년 수원군 수원면 매향리에서 태어났으며 개화기에 보급된 신문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학을 위해 돌연 서울로 상경하였으며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거쳤던 서울 상동교회소속 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정신을 고양 했다고 한다.

민중계몽운동가인 그는 과수원과 토지를 희사하여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교육을 수원에 처음 도입한 신식학교 삼일학당(지금의 삼일학교)을 건립 교감과 교장을 지내면서 지역민들의 민족정신을 고취시켰으며 1907년 독립운동가 서상돈과 함께 당시 일본에 진 부채 1,300만원의 국가 채무를 상환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경기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 시켰다.

그 후 1911년 만주에 망명길에 올랐고 그곳에서도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21년 만주 지린에서 밀정으로 인해 체포되어 평양 감옥으로 압송되었고 고문으로 인해 전신 마비 후 석방되었지만 거처할 집도 없는 고향인 수원에서 해방도 보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최근 많은 언론에서 한 대기업의 상도덕 문제 친일 논란 등으로 또 다시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 우리 국민들은 뜻을 함께하여 IMF라는 큰 시련을 겪었을 때 장롱 속에 있던 금을 모아서 국가 부도 위기를 넘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기업을 이끄는 임원들과 정치인들은 한일 합방 전 일본이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전략적으로 빚을 지게 하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임면수선생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펼쳤던 국채보상운동을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나라는 각급 분야에 애국자가 많이 있다. 대기업 보다도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말하고 싶다. 어렵고 힘든 여건이지만 내 가족 직원 그리고 사회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대기업이 세계로 진출하고 대기업이 재 역할을 해 줄 때 우리나라가 선진국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인 또는 사회 지도층 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역사 과목 자체가 없다. 누구를 탓 하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100여 년 전 신지식인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헌신과 고통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국민을 위해 종신위민(終身爲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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