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탁에 ‘봄동’이 나왔다. 중3 이맘때의 아련한 추억을 머금고 맛있게 먹었다. 식사 시간 내내 봄동과 더불어 사랑하는 어머님과의 추억을 삼켰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농산물을 팔기 위해 5일장에 나오신 어머님 자리로 달려가 봤다.
시골 분들은 닷새 만에 한 번 돌아오는 장날이면 곡식이나 야채 등을 장터에서 팔아 요긴한 현금을 마련하였다. 장날이던 그날 아침도 어머님 말씀에 따라 등굣길에 자전거 뒤에 봄동을 한 아름 실어다 드렸었다.

만약 팔리지 않았으면 다시 자전거에 실어 집으로 가야만 했기 때문에 걱정스런 마음에 시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어머님 앞에는 봄동이 아침의 반 이상이나 남아 있었다. 해는 서산으로 지고 있는데...

어머님과 나의 걱정스런 시선이 봄동 위에 내려앉아서 가늘게 떨었다. 어머님께서 앉아 계시는 자리는 야채전이 아니라 일용잡화점과 포목 가게들 앞이었다. 어린 생각에 봄동은 야채이니 야채를 사러 오는 손님들 눈에 들어야 팔릴 것 같았다.

“엄마, 이거 제가 야채전으로 들고 가서 팔아 볼게요.” 어머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파장을 앞둔 야채전은 어수선했다. ‘그 때’를 보고 좀 더 싸게 야채를 사기 위한 파장 손님들의 그림자가 석양(夕陽) 노을과 어우러져 기다랗게 너울거렸다.

“여기 봄동 있어요! 봄동 싸게 드립니다!! 봄동이요∼” 작달막한 키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이 외치는 야무진 소리에 지나가던 손님들이 봄동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섬주섬 봄동을 집어 드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봄동을 다 팔아야 자전거 뒤에 봄동 대신 온종일 수고하신 엄마를 모시고 갈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 가지고 나온 봄동을 다 팔지 못하고 자전에 다시 싣고 가게 되면, 집으로 가는 그 먼 길을 어머니는 걸어서 가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야채전 앞을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봄동을 거의 다 팔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움큼 밖에 남지 않아서 그냥 보자기에 쓸어 담아갈까 하다, 남김없이 팔면 어머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봄동 떨이요∼!! 봄동 싸게 드립니다, 봄동 떨이요!!!”라고 외치고 있는데 하얀 카라의 교복에 단발머리 여학생 한 무리가 내가 있는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잠시 말문을 닫았다.

나는 사춘기였다. 단 한명의 여학생과도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순백의 사춘기 소년이 “꿀∼떡!”하고 침을 삼키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여학생 무리는 어느새 내 코앞까지 왔다. 재잘거리는 여학생들의 얼굴 위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실 어머님 모습이 투영되었다. 내 앞을 스쳐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나는 다시 “봄동 떨이요∼!!”를 외쳤다.

지나쳐가던 여학생들이 나를 뒤돌아보며 까르르 하고 웃었다. 마지막 남은 봄동을 어떻게 팔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가운데 빈 보자기를 흔들며 어머님 자리로 갔다. 유복한 집 막내딸로,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라신 어머님의 가지런하시고 하얀 치아가 저물기 직전 석양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봄동과 함께 순백의 열여섯 사춘기 소년을 만나 얼굴을 부비며 잠시 눈시울을 젖는다. “매서운 한파를 온몸으로 이겨냈기에 봄동은 맛도 영양도 최고인거야...” 봄동 덕분에 한 없이 그리운 어머님의 다정하신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던 오늘은 참 기쁘고 감사한 날이다.


 

 

 

 /홍원식 논설위원·법학박사

홍원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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