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진입로에 벚꽃이 만개한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광교진입로에 벚꽃이 만개한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악산(光嶽山)이었다. 고려 야사에 따르면 서기 928년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부처님이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광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분기한 한남금북정맥은 안성 칠현산까지 연결된다. 이곳에서 다시 분기된 한남정맥은 서북쪽으로 이어져 용인 석성산과 광교산, 수리산을 거쳐 김포 문수산으로 연결된다. 

시루봉에 있는 광교산 표석.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시루봉에 있는 광교산 표석.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광교산은 한남정맥의 주봉이며 수원의 주산이다. 고려시대 광교산에는 창성사를 비롯하여 89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여러 곳에서 기왓장이 출토되어 예전에 절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1796년 정조시대 신도시와 화성이 축조되기 전까지 팔달산 일원은 광교면이었다. 신도시가 조성된 후 화성행궁 신풍루 앞길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부가 됐고, 남쪽은 남부가 됐다. 이후 북부면, 남부면으로 개칭됐다. 화성건설로 인하여 광교면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산 아래 마을 명칭인 상광교동과 하광교동만 지킨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50년대 광교산과 도심의 황폐한 모습. (사진=수원시)
1950년대 광교산과 도심의 황폐한 모습. (사진=수원시)

광교의 비운은 1940년 12월 11일 광교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시작됐다. 광교저수지가 축조되자 하류지역 홍수 피해는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교는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기 시작했다. 광교산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수원지역의 땔감 공급처가 됐다. 무분별한 벌목으로 광교산은 1950~1970년대 중반까지 나무 한그루 없는 헐벗은 산이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수원에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광교저수지를 개량해 1953년 11월 상수도 취수원을 조성했고 1971년 6월 상수원보호를 위해 광교저수지 유역 일원을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뒤이어 1971년 12월 29일 광교지역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됐다. 

상수도 보호구역과 개발제한구역 팻말. (사진=김충영 필자) 
상수도 보호구역과 개발제한구역 팻말. (사진=김충영 필자) 

광교는 상수원보호구역과 개발제한구역 이중 규제를 받게 되어 손발이 꽁꽁 묶이는 피해를 받게 됐다. 광교는 개발제한구역이 됨으로써 도시계획도로 하나 없는 곳이 됐다. 도로라고 해야 예전부터 사용되던 농로가 고작이었다. 광교는 그야말로 자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부터 사방사업이 진행되어 광교는 30여년 만에 울창한 숲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겨울철에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산금지 정책이 시행됐다. 1995년 7월 1일 취임한 심재덕 시장은 광교산을 연중 개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심 시장이 취임한지 70일이 지난 1995년 9월 9일이 추석날이었다. 추석 차례를 올리고 광교산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시민들은 자동차를 타고 광교에 올라왔다. 주차할 곳이 없자 광교 진입도 한편에 주차를 하고 산에 올라 갔다. 이어 올라온 사람들은 마을 안길에 차를 세우자 광교는 차량이 움직일 수 없는 지옥상황이 되고 말았다. 

오후가 돼서야 차량이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즉시 심재덕 시장에게 보고됐다. 심시장은 추석 연휴가 끝난 1995년 9월 11일 광교 관련부서 담당자들과 함께 주민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광교 주민들은 그동안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서 불이익을 받는 것에 분개했다. 어느 날 묻지도 않고 그린벨트로 지정했다고 했다. 

부엌이며 헛간, 농기계창고 하나 못 짓는 것은 물론이고 개축도 못하게 했다고 분개했다. 광교 주민들은 생계수단으로 젖소 사육이나 무허가로 보리밥집을 운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무렵 시내는 상업지역이다, 주거지역이다 해서 광교보다 몇 배가 비싸게 형성됐다. 게다가 시민들까지 몰려와 불편을 겪게 됐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심 시장은 주민들의 화난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 주민들과 대화를 한 후 광교업무를 건설과 도로계에 배정했다. 심 시장은 우선 광교에 승용차 진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체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광교등산객들이 시청버스를 이용한 셔틀버스를 탑승하고 있다. (사진=수원시)
광교등산객들이 시청버스를 활용해 운행한 셔틀버스를 탑승하고 있다. (사진=수원시)

그래서 찾은 방안은 시청과 구청에서 보유한 버스를 활용해서 공·휴일에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것이었다. 셔틀 버스 운영업무는 시청 회계과에, 승용차 진입 관리 업무는 장안구청에 맡겼다. 그리고 건설과에는 광교정비계획을 최대한 빨리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광교정비계획은 추경에 예산을 확보해서 1995년 12월 20일부터 시작됐다. 

광교정비계획은 개발제한구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사항이 포함됐다. 사업기간은 1997년부터 2001년 까지 5개년, 6개 부문으로 계획됐다. 주거환경개선 사업은 마을안길 정비와 상수도사업, 교통시설이었다. 이 때 진입도로 15~20m폭, 4430m가 계획됐다. 주차장은 제방 아래 주차장, 문암골 주차장, 마을회관앞, 하광교동으로 검토됐으며 종점에 회차장이 계획됐다. 

광교저수지 상류부터 광교산에 이르는 구간의 호안정비 및 저수로와 여울 조성사업이 계획됐으며 오폐수를 처리하기 위해 우사에서 발생하는 오수차집관거 설치가 제시됐다. 입구와 종점, 문암골에 화장실을 만드는 안과, 약수터 정비, 안내판, 등산로정비, 휴식시설 정비계획도 제시됐다. 광교정비 사업에는 총 205억원이 소요되는 사업계획이 수립됐다. 

광교주차장 2003년 모습. (사진=수원시)
광교주차장 2003년 모습. (사진=수원시)

사업추진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도시계획이 결정돼야 했다. 1단계 사업으로 광교진입도로와 마을안길 그리고 제방아래 주차장이 추진됐다. 광교주차장 결정이 먼저 진행되어 소형233대, 버스 7대를 수용하는 주차장사업이 먼저 진행됐다. 광교 진입도로는 광교입구에서 마을회관까지는 폭 20m, 마을회관에서 종점까지는 15m로 하고자 했다. 

의회 의견청취와 공청회 과정에서 15m와 12m로 축소됐다. 조정된 안으로 도시계획 결정을 추진했다. 그런데 도시계획 결정을 위해서는 경기도에 농지전용 승인을 얻어야 했다. 경기도는 당시 수원시가 월드컵 축구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많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입장에서 도로를 필요 이상으로 넓게 한다며 한 단계씩 낮추라고 했다. 

광교저수지 산책로 모습. (사진= 김충영 필자)
광교저수지 산책로 모습. (사진= 김충영 필자)

그리하여 15m도로는 12m로, 12m는 10m로 낮춰 추진됐다. 따라서 마을회관부터는 자전거도로는 물론이고 보도역시 협소하게 되고 말았다. 이즈음 심재덕 시장은 광교저수지 주변에 산책로 계획을 주문했다. 나는 당시 최준호 계장과 용역사인 경호엔지니어링 조영규 기술사와 길도 없는 절벽이나 다름없는 광교저수지 물가를 답사하기도 했다. 

심 시장에게 검토된 사항을 보고하자 저수지 산책로는 번듯한 길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꼭 필요한 곳을 정비해서 오솔길이 되도록 하라고 했다. 광교정비계획은 2002년 6월 30일까지 몇 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추진되었다. 

종점부분 하천좌안에 회차로와 수원시 로컬프드매장 부분에 주차장을 조성하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1995년 9월부터 6년이 넘게 추진된 셔틀버스 운행은 수원시 운전기사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사업이었다. 셔틀버스 운행사업은 심재덕 시장의 낙선으로 종료됐다. 후임 김용서 시장은 시내버스를 증차했다. 

광교1동 주민센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광교1동 주민센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광교의 불운은 2004년 6월 30일 이의택지개발사업지구가 지정되면서 시작됐다. 이의지구는 개발계획 수립단계에서 광교택지개발사업지구로 명칭이 변경됐다. 택지개발사업이 완료된 후 행정동 명칭은 광교동이 됐다.

화성이 축조되면서 광교면의 이름을 잃게 됐다. 이후 행정 동명도 광교동이 아닌 연무동에 속해야 했다. 광교택지개발사업으로 행정동 명칭을 도둑맞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광교동명이 발표됐을 때 상광교, 하광교 주민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항의했으나 광교택지개발지구 다수 주민들의 주장으로 관철되지 못했다.

가을 광교산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가을 광교산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 시민들은 광교산이 있어 행복하다. 그러나 이는 광교주민들의 희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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