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미주 샌프란시스코 대동보국회 회장 및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대동공보' '신한민보'의 주필로 항일언론을 선도했으며, 한인소년병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등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한 백일규(1880. 3. 11 ~ 1962. 5. 31)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부친 백린과 모친 송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운 선생은 동학에 깊이 공감하고 ‘접주’로 활동했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미주 유학을 결심, 1905년 6월 9일 진남포를 출발하여 일본 고베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에와사탕수수 농장의 고된 노동 중에도 선생은 ‘에와친목회’에 가입하여 윤병구, 강영소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고 이후 미주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문양목의 후임으로 대동보국회 중앙회장 겸 '대동공보'의 주필에 선임돼 일본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1908년 미주 한인사회의 반일여론은 같은 해 3월 23일,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극대화됐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대한 제국 외교고문에 대한 응징이자 일제에 대한 경고였다. 의거 직후 선생은 ‘7인 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양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함은 물론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고 무단통치가 자행되자 미주 사회에서도 상무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1912년, 선생은 네브라스카에 한인소년병학교 간부로 군인양성을 위해 힘쓰는 한편, 1913년 링컨 시에 있는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7월부터 '신한민보'의 주필이 되어 항일적인 논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1915년 1월 주필직을 사임한 뒤 UC 버클리 대학에 서 학업을 계속하는 한편 상항한인감리교회 엡웟청년회 학문국장,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중앙총회 대의원, 버클리 한인학생양성소 설립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졌다. 이는 계기로 한인사회의 재정모금활동을 비롯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재정적 지원을 활동이 전개됐다. 선생은 독립운동 지도를 위해 상해로 떠난 안창호 선생을 대신하여 미국, 하와이, 멕시코 지역 독립운동의 사령탑을 맡았으며, 1919년 3월부터 '신한민보'에 '한국경제사'를 연재하여 이듬해 책으로 발간했다. 이는 국내외 최초의 한국경제사 서적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가독립’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8년간 북미지방총회 총회장과 신한민보사 사장 겸 주필로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한 선생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참여해 조선의용대의 재정적 지원을 위해 앞장섰고, 이후 기관지 《독립》이라는 신문의 발기인이며 주요 논객으로 활동하는 등 항일언론과 한인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헌신했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하와이 국민회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는 등 재미동포를 위2해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 1962년 5월 31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자료제공=수원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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