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톺아보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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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톺아보기 (16)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4.2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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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3월 19일에 충청감사 조병식(1823~1907)을 파직한 고종은 선무사 어윤중을 충청도로 보냈다. 4월 1일에 어윤중은 보은군수와 함께 동학교도에게 임금의 윤음을 읽으면서 해산을 명하였다. 아울러 어윤중은 탐학한 관리들을 엄히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동학 지도부는 어윤중의 말을 믿고 해산하였다.

1893년 11월 7일에 어윤중은 탐오한 죄인 조병식의 처벌을 아뢰었다.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의 장계(狀啓)에, ‘전 충청 감사 조병식의 탐오하고 포악한 정절(情節)에 대하여 조사하고 성책(成冊)하여 올려보내니 그의 죄상을 의정부에서 조치하소서.”

이에 고종이 전교하였다.

“장계를 보니 범장(犯贓)한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사리에 어긋나게 처리한 일도 많으니 의정부에서 조치하라.”  (고종실록 1893년 11월 7일 1번째 기사)

1895년 3월 22일에도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 대신 서광범이 아뢰었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조병식은 감사(監司)로 여러 차례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잔인하기 끝이 없었고 포악한 위엄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사람을 함부로 죽인 일이 많습니다. 또 이로 해서 변란의 싹이 발생하였는데 아직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잡아다 신문하여 부정 축재를 추징하고 처벌하게 하소서."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895년 3월 22일 1번째 기사)

그러나 고종은 1895년 7월 3일에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죄인들인 민영준, 조병식,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조병갑,이용태, 김문현, 이용직, 조필영 등 278명을 방송(放送)하라고 명했다.

고종의 조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부패한 민씨 척족과 그리고 동학 농민봉기를 일으키게 한 고부군수 조병갑, 장흥 부사 이용태, 전라감사 김문현 등을 모두 풀어주다니. 이게 망국의 조짐이었다.

그런데 1895년 8월 20일에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일본인들에 의해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 이후 조병식은 승승장구했다. 1896년 12월 12일에 법부대신에 임명되었고, 1897년 11월 13일에는 외부대신으로 일하면서 러시아 관리 알렉쎄예브를 탁지부 고문관으로 고용하였다.

(고종실록 1897년 11월 13일 3번째 기사)

한편 1898년 9월 14일에 의정부 참정 윤용선이 아뢰었다.

"이번에 궁중에서 일어난 사변은 옛날에 없던 것입니다. 신민(臣民)들은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대소(大小) 신료들도 똑같은 마음이었는데, 중추원 의관 조병식은 총상회장(總商會長)으로서 방문(榜文)을 붙여 상인들에게 점포를 닫도록 일렀다고 합니다.

비록 경무청에서 효유(曉諭)하여 즉시 점포를 열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견책(譴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9월 14일 1번째 기사)

이윽고 9월 29일에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아뢰었다.

"방금 삼가 들으니, 9월 26일 밤에 시민 7, 80명이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의 집에 모여 회장의 신칙이 있었다고 하면서 규칙(規則)을 허락하도록 시위했습니다. 그래서 대치하였는데 전(前) 의관 안명호와 상공 국장 송헌빈이 그 자리에 있다가 끌려 나와 형세가 험악하게 되는 바람에, 끝내 이도재는 그 규칙을 허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중추원 의관 조병식은 고관(高官) 신분으로서 총상회장이 된 것이 이미 옳지 않은 것이고, 견책이 내려진 상황에서 뉘우치고 반성해야 하거늘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사주해서 대신과 관리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농상공부 대신은 이미 금지하였다가 후에 다시 허락하였는데, 아무리 부득이한 형세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연약하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큰 문제입니다.

경무사 민영기는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고 또 3, 4시경에 금단(禁斷)시키지도 못하였으니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의관 조병식,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 경무사 민영기는 모두 본관(本官)을 면직(免職)하소서."

이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조병식은 고관으로서 패악스러우니, 법부로 하여금 경기 연해 지역에 찬배(竄配)하게 하고, 이도재, 민영기는 모두 그대로 윤허한다." (고종실록 1898년 9월 29일 양력 2번째 기사)

이어서 10월 1일에 고종은 조병식을 통진군(通津郡)으로 3년 동안 귀양보냈다.(고종실록 1898년 10월 1일 2번째 기사)

이로부터 열흘이 지난 10월 11일에 고종은 조병식을 특별히 놓아줄 것과 징계를 특별히 면제할 것을 명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11일 3번 째기사)

10월 17일에 고종은 조병식을 의정부 찬정에 임명했다. 이는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덕수궁 함녕전  (고종의 침전)  (사진=김세곤)
덕수궁 함녕전 (고종의 침전)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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