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27회 이극돈, 사초와 관련하여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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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27회 이극돈, 사초와 관련하여 상소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2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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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7월 18일에 유자광(1439~1512)이 실록청(實錄廳)에서 초한 사초(史草)에 누락이 있는가 의심하여 다시 수검(搜檢)할 것을 연산군에게 청했다. 이러자 「성종실록」 편찬 시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한 성준은 "이는 우리들이 모르는 바이다. 무릇 사람들이 입계(入啓)하는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 독차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대사헌 강귀손도 또한 불가하다 말하니, 유자광이 드디어 정지하였다.

이윽고 강귀손이 남곤으로 하여금 좌중에서 말하게 하였다.

“지금 국옥(鞫獄)에는 위관(委官)이 있고 의금부도 있지만 일찍이 그 일을 힘써 주장하지 아니했는데, 힘써 주장한 자는 오직 무령군(武靈君 유자광이 예종 때 남이(1441~1468)를 무고하고 받은 군호)일 따름이다. 1)

비밀에 속하는 일은 진실로 단독으로 아뢰는 것이 당연하지만 만약 공 공연한 일이라면 마땅히 공의(公議 공공연한 논의)를 거쳐서 아뢰어야 하는데, 사초(史草)를 다시 초한 일은 좌중이 모두 모르고 무령군이 단독으로 아뢰니, 그윽이 미편(未便)하다고 생각한다.”

남곤(1471~1527)은 14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496년 11월 18일에 사간원정언, 1498년 1월 5일에 홍문관 수찬을 하였다.

이에 유자광이 노하여 피혐(避嫌)할 것을 청했으며 강귀손도 또한 그 뜻을 아뢰었다.

연산군이 "지금 큰일이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으니, 경 등이 아뢰는 것은 수리하지 않겠다."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4번째 기사)

7월 19일에 연산군이 실록청 당상들에게 전교하였다.

"지금 서계(書啓)한 제신들의 사초 내에 무릇 세조 조에 간여된 일에 대해 누락이 있는 것이 아니냐? 다시 자상히 검토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러자 이극돈·유순·홍귀달·허침·안침이 아뢰었다.

"신 등이 모두 무상(無狀)하여 지금 중죄를 얻어, 의금부에서 조율(照律)하여 입계(入啓)하였으므로 집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춘추관(春秋官)은 대간(臺諫)과 더불어 다름이 없으니, 신 등이 임의로 사국(史局)에 들어가 상고(詳考)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역시 「성종실록」 편찬 시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한 어세겸이 아뢰었다.

"신은 비록 조율(照律)이 안 되었다 할지라도 죄가 이극돈과 동일하오니, 감히 피혐(避嫌)하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빨리 상고해서 아뢰도록 하라."고 다그쳤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1번째 기사)

이날 이극돈이 사초의 일에 대한 일로 상소하였다. 이극돈(1435∼1503)은 「성종실록」 편찬 시 지관사(知館事)로서 사초를 열람하면서 자신의 비행이 사관 김일손에 의해 기록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실릴 상황에 몰리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세조 때의 궁금비사(宮禁秘事)를 유자광에게 알렸다. 2)

그러면 상소문을 읽어보자.

"신이 무상한 몸으로 외람되이 열성조의 은혜를 입어, 여러 조정을 내리 섬김에 있어 비록 자그마한 보탬도 없었지만 일찍이 탄핵은 한 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국(史局)에서 하는 일이 착오되어 계사를 지연시킨 죄를 범했사오니(以犯遲啓之罪), 신은 실로 달게 받습니다.(臣實甘受)

다만 사적(事迹)과 신의 마음은 다름이 있으므로 신이 감히 스스로 해명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15일에 전교하기를 ‘9일에 처음으로 사초(史草)를 보고 장차 패로(敗露)가 있을 것을 알았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겉으로는 충신 같으나 안으로는 실로 다른 생각이 있다.’ 하셨으니,

이는 모두 인신(人臣)으로서 임금을 속인 죄라서 신은 이 전교를 들은 후로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그날 언어로써 계달(啓達)할 것을 청했는데 ‘지만(遲晩) 다짐을 받으라.’ 특명하시므로 신은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옵고 물러 나와 생각하오니, 비록 궁벽한 골짜기에 사는 세민(細民 가난하고 천한 백성)이라도 조금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모두 스스로 말씀드릴 수 있사온데, 하물며 신은 대신이고 지척에 있는 몸으로서 능히 스스로 해명을 못한다면 신의 원왕(冤枉 원통스러움)을 어찌 다 말하오리까. 그러므로 감히 사건에 대한 시말(始末)을 아뢰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연산군 묘(사진=김세곤)
연산군 묘(사진=김세곤)

 

1) 야사(野史)에는 유자광이 남이의 시를 고쳐서 모반의 증거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 (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그런데 유자광은 위 시 3구의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못 얻으면)으로 고쳐 남이를 고변했다. 이처럼 유자광은 정치공작의 달인이었다.

 

2) 이극돈은 광주이씨(廣州李氏)로 5형제 모두가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이었다. 이극배는 영의정을 지냈고, 이극감은 형조판서, 이극증은 판중추부사, 이극돈은 좌찬성, 이극균은 좌의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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