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톺아보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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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톺아보기 (25)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3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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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제18일째인 1898년 11월 22일, 이른 아침부터 더욱 많은 시민들이 종로에 모여들었다. 학생들도 휴학하여 수만 명의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군인들도 일부 고급장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만민공동회를 지지했고, 심지어 경무청의 순검들까지도 만민공동회를 지지하고 정부를 비판하였다.

이때 마포에 사는 한 시민이 만민공동회에 달려와서 마포에 둔을 치고 있는 보부상의 행패가 크다고 보고하였다. 분격한 일부 시민들은 빈손으로 마포로 달려갔다. 그런데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시민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보부상들은 물푸레 몽둥이를 휘둘렀으므로, 결국 신기료 장수 김덕구가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어 시민들이 패퇴하였다. 하지만 이는 만민공동회의 전의를 더욱 불태우게 만들었다.

이날 오후부터 고종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불러들여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미 윤치호의 능력 밖이었다.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의 부활과 보부상들의 단체인 상무사의 폐지를 칙령으로 승낙했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22일 5번째 기사)

그런데 시위대(侍衛隊 궁궐 수비대)와 순검들이 궁궐을 잘 호위하지 않고 만민공동회를 지지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1월 22일 밤에 각국 공사·영사와 그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서 자신을 호위토록 하였다. 고종을 하룻밤 호위해 주고 나온 각국 외교관들은 11월 23일 아침에 회의를 열어 논의해 보았으나 통일된 안을 만들지 못했다.

일본 공사 대리가 병력을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 하자고 제안했지만 영국 공사와 미국 공사는 반대했다.

고종은 이날 내부대신서리와 경무사를 보내 독립협회 복설이 승인되었으니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다음 3개 조건을 내걸고, 그것이 수락되면 해산하겠다고 응답하였다.

① 이기동·조병식·민종묵·유기환·김정근·길영수·박유진·홍종우 등 8역(逆)을 즉시 체포하여 법률에 따라 처벌할 것.

② 마포 강변에 둔취하고 있는 보부상들을 해산시킬 것

③ 명망있는 정부 인사를 임명할 것

정부가 3개 조항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자, 만민공동회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일시 해산하기로 결의했다.

이 날 고종은 박정양, 민영환 등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는 인사들을 주축으로 각료를 개편했다. 박정양을 의정부 참정, 민영환을 내부대신, 권재형을 농상공부대신, 이근호를 경무사, 윤치호를 한성부 판윤, 탁지부 협판(協辦 차관) 고영희를 탁지부 대신 서리로 임명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23일, 11월 24일)

이러자 보부상들이 강력 반발했다. 이들은 각 지방에 통문을 돌려 비상 소집을 하였다. 11월 24일에 홍종우는 대중연설을 통해 정부가 초기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강력 비판했다.

“정부는 이미 신의를 잃었다. 우리들은 보부상이 아니라 의병이다. 보부상은 정부의 명령을 따르나, 의병은 자유의 권리가 있다.”

정부는 13도에 보부상들의 상경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려보냈지만, 이는 실효성이 없었다.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양측의 주장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편 11월 25일까지 정부 측의 뚜렷한 실천이 보이지 않자, 만민공동회는 11월 26일 오전 10시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다시 개최했다.

이즈음 보부상들은 은밀히 수구파의 지원을 받으면서 상경 인원이 늘어나며 마포에 둔취(屯聚)하고 있었고, 종로에서는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다시 개최되어,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의 대치는 11월 23일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로 되어 혁명 전야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고종은 직접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하였다. 고종은 만민공동회에게 26일 오후 1시에 200명의 대표를 선정해서 정동의 경운궁 문밖에서 대기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고종은 또한 황국협회에 대하여도 오후 3시에 역시 200명의 대표를 선정하여 대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에 만민들은 집회 장소를 종로로부터 정동으로 옮겨 대회를 열고 대기하였다.

고종은 오후 1시에 작은 가마를 타고 경운궁 돈례문(남문)의 군막에 친히 나왔다. 이 자리에는 각부 대신 및 외국 공사·영사와 그 부인들이 좌우에 정렬하였다.

덕수궁 덕홍전과 함녕전 (사진=김세곤)
덕수궁 덕홍전과 함녕전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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