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칼럼] 10월 26일, 두 번의 총성이 한국사에 남긴 명암(明暗)과 과제

> - 국권 침탈의 어둠 속에서 울린 독립과 동양평화의 절규 (1909년 하얼빈)
> - 권위주의 장기 집권을 끝낸 헌정사의 격동과 민주화의 그늘 (1979년 궁정동)
> - 주권 수호와 민주적 절차, 오늘날 성숙한 사회가 되새겨야 할 교훈

- 매체: 수원일보 — 수원·화성·용인 경기남부 뉴스 · 1989년 창간 37년, 경기도 제1호 인터넷신문(등록번호 경기 아 00001)
- 기자: 최승호 기자
- 발행: 2026-10-26T11:15:44+09:00 · 수정: 2026-10-26T11:57:19+09:00
- 섹션: 오피니언 > 칼럼
- 원문(캐노니컬): https://www.suwonilbo.kr/news/articleView.html?idxno=L261026101253e547
- 인용 표기: 수원일보, “[역사 칼럼] 10월 26일, 두 번의 총성이 한국사에 남긴 명암(明暗)과 과제”, 2026-10-26, https://www.suwonilbo.kr/news/articleView.html?idxno=L261026101253e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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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0월 26일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이례적이면서도 거대한 역사의 전환점이 중첩된 날이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역 플랫폼에서의 총성은 나라를 빼앗기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독립을 외친 사건이었고, 70년 뒤인 1979년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의 총성은 18년 동안 지속된 권위주의 장기 집권 체제의 막을 내리게 한 사건이었다. 같은 날짜에 울려 퍼진 이 두 번의 총성은 한국사에서 각각 국권 회복과 정치적 변동이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심대한 파장을 가져왔다.

**하얼빈의 총성: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의 비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상징적 인물이자 초대 한국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을사늑약(1905년)과 정미7조약(1907년)을 거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과 군대 해산이 강행되던 국권 해체 국면 속에서 감행된 이 거사는, 단순한 개인적 테러가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수행한 정규 의병 투쟁 및 전시 법률에 기반한 군사 행동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사상적 측면에서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이 사건을 단순한 보복이나 국수주의적 폭력의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규정짓는다. 그는 한·청·일 3국이 대등하게 협력하여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진보적 이상을 제시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한 '동양평화론'이 실제로는 이웃 국가의 주권을 침탈하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불과함을 입증하려 했던 선구적 결단이었다.

비록 하얼빈 의거가 일제의 국권 침탈을 즉각 저지하지는 못했고, 1910년 한일병합이라는 일제의 강경책을 가속화했다는 한계도 지적되지만,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에 강력한 도덕적·정신적 동력을 제공함은 물론 중국의 신해혁명 세력과 3·1 운동 격문에도 깊은 영감을 주며 동아시아 항일 연대 의식을 고취시켰다.

**궁정동의 총성: 유신 체제의 종말과 민주화의 과제**

하얼빈의 총성으로부터 70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함으로써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권과 1972년 출범한 유신 체제는 돌연 종식을 맞이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YH 무역 사건,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극도의 정치적·사회적 갈등 속에서 체제 내부의 균열이 극에 달해 있었다.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여전히 다각도로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18년에 걸친 권위주의적 장기 집권을 끝냄으로써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물리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 원수에 대한 암살이자, 의회주의나 시민 사회의 정당한 정치적 절차가 아닌 최고 권력 기관 내부의 총성으로 국정이 중단되었다는 점에서 헌정사적 비극이자 한계로 지적한다.

이 사건이 남긴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유신 체제의 해체가 즉각적인 민주주의 정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권력의 공백을 메운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거쳐 또 다른 권위주의 정권을 출범시켰다. 권력의 비제도적 해체가 가져온 '서울의 봄'의 좌절은, 권력 변동이 정당한 민주적 절차와 시민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하는 혹독한 대가를 일깨워 준다.

**두 번의 총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1909년과 1979년의 10월 26일은 각기 다른 시대적 과제 속에서 거대한 폭발음을 냈다. 안중근의 총성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의 주권'을 바로 세우고자 한 항거였다면, 궁정동의 총성은 권력의 과도한 집중 속에서 '국민의 주권'과 민주적 절차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역사의 거사나 결단이 올바르게 평가받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지향하는 가치와 함께 수단의 정당성,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냉철한 성찰이 수반되어야 한다. 안중근의 의거는 동양평화라는 명확한 대의와 평화적 비전을 전제로 했으며, 궁정동의 사건은 제도적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오늘날 10월 26일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찬양하고 비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주권을 지키기 위한 희생의 무게를 되새기는 동시에,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핵심 가치가 극단적인 폭력이 아닌 성숙한 제도와 시민적 합의를 통해 지속되고 발전되어야 함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두 번의 총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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