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화성 기념표석. (사진=김충영 필자)
세계문화유산 화성 기념표석.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성(水原城)’이 ‘화성(華城)’으로 제 이름을 찾자 심재덕 수원시장은 본격적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운동을 시작했다. 이 때 문화재청은 1996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곽과 궁궐을 1997년 등재 예정인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키로 했다. 궁궐은 창덕궁을 신청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성곽은 광주 남한산성과 보은의 삼년산성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최종선택은 수원화성이 받았다. 이는 건축역사학자이자 화성에 대한 최고 권위자인 김동욱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었다. 

김 교수는 화성의 가치와 우수성을 전 세계 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화성은 심재덕, 이종학, 김동욱 이 세 사람의 노력으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7년 6월 21일 외무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유네스코 이사회에서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보될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심재덕 시장의 충격은 컸다. 수원시청 문화재팀장에게 유네스코 이사회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가자고 했다. 평소 화성에 관심이 많은 연합뉴스 박두호 기자에게도 연락을 해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화성성역의궤.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성역의궤. (자료=화성박물관)

심재덕 시장은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전 이종학 선생이 만든 ‘화성성역의궤’ 영인본과 한국전통문화의 상징인 ‘방패연’을 준비했다. 그리고 화성을 반드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품고 1997년 6월 23일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은 속전속결로 추진됐다. 

유네스코는 신청서만 보고 1차에서 탈락시킬 것인지 아니면 심사단을 보내 실사를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다행히 창덕궁과 화성 모두 1차 심사를 통과했다. 이듬해인 1997년 3월초에 국제기념물유적협회 소속 스리랑카의 실바(Nimal De Silva) 교수가 화성을 실사하기 위해 수원을 방문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심사 모습. (사진=수원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심사 모습. (사진=수원시)

실사를 담당하는 심사위원의 판단이 등재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에 수원시는 실바교수에게 최선을 다해 화성의 우수성을 설명했다. 당시 통역은 중앙초등학교 이성철 목사가 담당했다. 그와 더불어 국제박물관협회(ICOM) 한국위원장 이었던 백승길 교수가 통역을 도와주었다. 

이런 노력으로 실바 교수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견을 표명하고 돌아갔다. 수원시는 유네스코 이사회의 통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를 받았고, 화성은 등재 유보 소식을 들은 것이다. 

심재덕 시장과 박두호기자 파리 생드니경기장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해우재 제공)
심재덕 시장(왼쪽)과 박두호기자가 파리 생드니경기장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해우재)

수원의 미래를 위해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심재덕 시장은 연락을 받은 지 이틀 뒤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 도착한 첫 날, 일행은 유네스코 한국대표부를 찾았다.

당시 파리를 방문한 박두호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유네스코 한국 대표부는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다니까요. 집행위원들이 안 된다고 했는데…….” 하면서, 수원시 일행의 방문을 못마땅한 눈치로 보았다고 한다. 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는 의미의 말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두호 기자는 분한 마음이 들어 주머니에서 취재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는 척 했다고 한다. 그러자 금세 말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게 아니고…….”

대사도 자신이 너무 부정적으로 맞이했음을 느낀 듯 했다고 한다. 대사는 대표부 서기관 1명을 심 시장 일행이 유네스코 업무를 보는 동안 보좌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대사관에 대사차량 외에 유일하게 한 대 있는 업무용 차량과 운전기사까지 배정했다. 이렇게 하여 전화위복의 상황이 됐다.

당시 유네스코 이사회는 화성 그 자체로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주변경관이 너무도 좋지 않아 제대로 보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6.25 전쟁 때 파괴된 곳이 많아 화성을 ‘온전한 유적’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란도 일었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인지 심 시장은 파리 한복판에서 백승길 교수 부부를 만나게 됐다. 화성 실사를 위해 왔던 실바 교수를 응대한 분을 만난 것이다. 영어에 능통한 전문가가 필요했지만 급하게 떠난 출장이라 전문가를 찾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심 시장은 백 교수를 보자마자 “내가 나중에 유럽여행을 따로 시켜줄 테니 꼭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백교수는 국제적인 박물관 전문가로 활동도 했지만 유네스코에도 인맥이 많았고 국제기구의 의전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백교수는 심시장의 부탁을 받아들여 수원시 방문단을 돕고 나섰다. 

1997년 6월 25일자 심재덕 시장 업무일기. (사진=해우재 제공)
1997년 6월 25일자 심재덕 시장 업무일기. (사진=해우재)

심재덕 시장은 6월 25일 새벽 기이한 꿈을 꾸었다. 끝없이 높은 계단에서 자신이 매달린 상태로 오르고 있었다. 힘들게 올라가다가 두 단계 아래로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 가까이 갔을 때 정상에서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심재덕은 그 손을 잡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이 꿈을 꾼 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백승길 교수는 국제기념물협의회(ICOMS) 조정관을 만나 이사회 7개국 심의위원들과의 미팅 날짜를 잡아주었다. 그날이 바로 6.25날이었다. 당시 멕시코가 의장국이었는데 수원시 방문단은 호주, 일본, 독일의 심사위원 등과 면담을 했다. 유네스코 임원들은 심재덕 시장의 적극적인 모습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에 감동 받은 것이다.

당시 41개 지역에서 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했는데 유네스코까지 직접 찾아온 사람은 심재덕 시장이 유일했다. 유네스코 집행위원들은 “화성의 문화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성곽 바로 옆에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을 우려했다. 이는 문화유산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판단해 등재를 유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심재덕 시장은 화성을 보호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심사위원들은 심시장의 진정성을 느끼고 등재를 위한 몇 가지 보완사항을 요구했다. 심시장은 그동안 문화재보호구역 지정사례와 도시계획법에 의해 관리된 사항을 설명했다. 

앞으로 화성주변의 토지를 매입해 성곽과 주거지역을 이격하고, 매입한 토지는 화성관련 시설을 유치하겠다고 설명했다. 유네스코 집행 위원들은 심 시장의 답변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화성을 창덕궁과 함께 집행위원회 본안으로 상정했다. 

심 시장은 집행위원회의 최종 결정을 앞두고 유네스코 대사에게 부탁해 집행위원 13명과의 만찬을 요청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회합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유네스코 대사는 심 시장의 열정에 감복해 만찬을 성사시켰다. 만찬은 파리의 한 호텔에서 6월 26일 오후 8시에 시작됐다. 

사전에 유네스코 집행위원들을 만났기에 낯이 익었던 심 시장은 화성보호 프로그램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심 시장은 그날 자신이 한 이야기를 술회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개발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수원시민들도 저에게 개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화성 성곽 안에 사는 사람들의 개발 요구는 너무나도 심합니다. 

화성 안은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집을 높이도 못 짓고, 못하나 제대로 박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여러분들이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지 않으면 곧바로 수원으로 돌아가 화성을 허물어 버릴 것입니다. 화성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저와 시민들 때문이 아니고 바로 당신들 때문이란 것을 알기 바랍니다. 

화성은 6.25전쟁기간 많은 부분이 파괴됐지만,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원형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심시장은 유머를 섞어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무언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유네스코 임원들은 화성의 중요한 가치를 인정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만찬 이틀 뒤, 수원화성은 일본, 호주 대표의 지지발언을 통해 유네스코 이사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권고’를 받는 쾌거를 이룬다. 

‘등재 권고’는 사실상의 ‘등재’나 다름없었다. 만약 심재덕 시장이 파리로 날아가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시장은 이 소식을 수원과 자매결연한 호주 타운스빌시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들었다. 심시장 일행은 비행기 안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를 자축했다. 

화성세계문화유산 등재 인증서. (사진=화성사업소)
화성세계문화유산 등재 인증서. (사진=화성사업소)

그리고 1997년 12월 6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화성은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으로 통과 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는 심재덕의 혜안이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간절히 원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꼭 이루어진다는 말이 실현되는 일대 쾌거였다. 언젠가 어느 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수원이 수원화성에 수천억원을 쓰며 올인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고 했다. “그것은 세계문화유산 등록증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평전 표지. (사진=해우재)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평전 표지. (사진=해우재) 

2022년은 지자체장 선거가 있는 해이다. 심재덕 시장처럼 수원의 미래를 여는 마인드를 가진 후보가 시장이 되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