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의 월도총도 중 오관참장세(五關斬將勢)의 부분. 큰 월도를 가지고 몸을 회전해 원심력을 극대화시켜 적을 단칼에 베어내는 자세이다. 왼편으로 크게 돌아 베고, 다시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마무리한다.
『무예도보통지』의 월도총도 중 오관참장세(五關斬將勢)의 부분. 큰 월도를 가지고 몸을 회전해 원심력을 극대화시켜 적을 단칼에 베어내는 자세이다. 왼편으로 크게 돌아 베고, 다시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마무리한다.

- 월도를 치켜세운 관운장
 
 위풍당당하게 월도를 세워 들고, 길고 흰 수염을 날리는 관운장.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유비, 관우, 장비 이야기는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서 대중소설로 읽혀질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근래에는 영화나 TV사극 시리즈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날릴 정도가 되었다. 그 중 무성(武聖)으로 불릴 정도로 무예의 달인으로 묘사된 관우(關羽)는 남다른 외모와 기상 넘치는 품성이 매력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관우에 대한 흠모의 마음은 조선시대에도 넘쳐났다. 이미 임진왜란 때부터 조선에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사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점에 관우가 존재했을 정도였다. 서울 도성에 관우신앙의 구심점이 동서남북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서울의 1호선 동묘(東廟)역이 실은 동쪽의 관우사당인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줄임말이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우리나라 서해안에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남아 있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에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關王廟: 줄여서 ‘관묘’라고도 함)가 처음 생긴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그러나 거의 100년 동안 관우의 영험함을 빌려 개인적 복을 구하는 사람들만 즐겨찾는 장소였다. 선조가 처음 이 곳을 찾을 때는 그저 왕이 무묘(武廟)에 찾아가는 예를 차용했을 뿐이었다. 이후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되어 작은 제향 정도만 진행되었다.

 이 장소는 숙종대(肅宗代)에서 정조대(正祖代)에 이르는 동안 국가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바로 관우를 정치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국왕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매개체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숙종대부터 확연하게 드러난다. 숙종은 관우를 충의(忠義)와 존주(尊周)의 모습으로 신하들에게 각인시켰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처세술보다는 정의(正義)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관우와 장비는 당시 잃어버린 한(漢) 왕조의 수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는 유비(劉備)의 모습을 보고 의형제가 된 것이다. 그렇게 도원결의를 맺은 세 명의 의형제들은 촉한(蜀漢)을 가장 정통성이 있는 나라로 여기는 ‘촉한정통론’을 지키는 장수로 당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들이 펼친 멋진 이야기는 대중적으로 성공한 소설인 나관중의 『삼국연의』라는 책을 통해 조선에도 널리 퍼졌다. 그 관우의 모습을 보며 숙종도 느낀 것이다. 

 숙종은 관우를 모신 사당인 관왕묘(關王廟)를 만들어 제의를 행하게 하고, 역대 충신들의 사당을 도성 이곳저곳에 만들어 문무백관은 물론이고 백성에게도 충절의 이념이 퍼지도록 했다. 숙종은 도성의 남관왕묘와 동관왕묘에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걸어두게 할 정도로 관우에 애착을 보였다. 심지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직접 관왕묘에 친림해 문무백관을 이끌고 제사를 주관하기까지 했다. 

 당시 숙종이 남긴 관련 비망기(備忘記)가 남아 있다. ‘아! 무안왕(武安王, 관우)의 충의는 참으로 천고에 드문 것이다. 어제 들러 유상(遺像, 초상화)을 본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물게 서로 느끼는 뜻에서 나왔고, 또한 무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지 본디 한때의 유람으로 즐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아아, 너희 장수와 군졸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충의를 더욱 스스로 애써 노력하여 왕실을 지키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것이다.’ 

 숙종은 관왕묘 제례로 신하들이 자파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과 왕에 대한 충성으로 돌아올 것을 권고한 것이다. 숙종은 선대왕의 능(陵)에 거동할 때면 능의 위치에 따라 동관왕묘나 남관왕묘에 먼저 들러 제사를 지내고 능행에 참여한 문무백관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압박했다. 

 숙종이 관우를 무안왕이라고 왕의 신분으로 격상시켜 모시긴 했지만, 관우는 장수 출신이기에 문관들은 반발하기도 했다. 숙종대에는 여러 차례의 서인과 남인의 대결양상이었던 ‘환국(換局)’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기에 국왕인 숙종은 절대적 믿음을 받는 관우를 조선으로 과감하게 수용한 것이다. 

 숙종은 관우의 충성심을 국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 보편적인 정의를 지향하는 차원으로 그 존재 의미를 부각시켰다. 또한 관우는 단지 무력이 뛰어난 장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춘추(春秋)』를 비롯한 다양한 유교 경서를 즐겨 읽었던 정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장수로 인식시켰다. 이는 단순히 무인(武人) 장수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문인(文人) 신하들에게도 충분히 압박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바로 관우로 대표되는 ‘무(武)’의 정통성과 정의로움을 국내 정치현실에 설파하여 신하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후 영조와 정조는 관왕묘를 조선의 무묘로 정립시켰으며, 국왕이 능행이나 원행길에 오르기 전에 스스로 갑주를 착용하고 무묘에 먼저 인사를 올리고, 신하들에게도 예를 표하도록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그곳에서 관우처럼 갑주를 착용한 국왕의 모습을 상상해보시라!

 또한 고종은 황제국을 표방하며 대한제국을 준비하던 때인 1896년(고종 33)에 조선의 모든 국가 의례를 새롭게 정리한 『대한예전(大韓禮典)』에 그동안 명문화되지 못했던 관왕묘 의례를 소사(小祀)에서 중사(中祀)로 격상시켜 관우의 충절을 공식적으로 알리려 했다.

- 월도의 오관참장세(五關斬將勢)에 담긴 관우 전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 중 월도(月刀)에 오관참장세(五關斬將勢)라는 자세가 있다. 월도를 좌우로 크게 휘둘러 베어 가장 폭발적인 위력을 보여주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 자세에 관우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그 이름처럼 관우가 오관(五關-다섯개 관문)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베는 자세다. 

 월도를 크게 휘둘러 회전하며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수평으로 목을 베어내고, 바로 이어 무릎 높이까지 대각선으로 쓸어내리는 자세에 해당한다(向右回擊-掃左一擊). 관우의 무공과 충심이 높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그런데 이는 정사 『삼국지(三國志)』에는 없고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에만 등장한다. 관우의 무예실력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각색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조조의 집요한 공격으로 유비는 군사들을 많이 잃고, 하북의 원소에게 피신했다. 장비는 망탄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관우는 조조 휘하의 장수 장료의 설득으로 일시적으로 조조 군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당시 관우는 조조에게 세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첫째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닌 한나라 황실에 투항한 것이며, 둘째 유비의 두 형수를 잘 돌봐줘야 할 것이며, 셋째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유비의 행방을 확인한 관우는 두 형수(감부인과 미부인)를 모시고 조조를 떠나 다시 유비에게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관우가 조용히 조조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로 그렇게 조조 군을 떠나 유비에게 가는 도중 험준한 요새와 같은 곳에 세워진 5개의 관문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차례로 단칼에 베면서 돌파하는 장면을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고 한 것이다. 이때 관우는 낙양을 향해 말을 타고 탈출하였다. 

 첫 번째 관문인 동령관에서는 장수 공수(孔秀)의 목을 베고, 두 번째 관문인 낙양관에서는 장수 한복(韓福)과 맹탄(孟坦)을 단칼에 베어 죽였다. 세 번째 관문인 사수관에서는 장수 변희(卞喜)와 자객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네 번째 관문인 형양관에서는 그곳의 태수였던 장수 왕식(王植)을 베어 죽였다. 마지막으로 황하로 통하는 관문인 활주관에서는 하후돈의 부하인 진기(秦琪)의 목을 베고 황하를 건너 유비에게 돌아간 것으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정사에서 조조는 그저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라’고 할 정도로 아쉬움만을 표하고 추격대를 보내지 않았다. 만약 관우가 국방상 중요한 관문 다섯 개를 격파하고 장수의 목을 베었다면, 제아무리 조조라고 할지라도 상대의 맹장 관우를 곱게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24기의 다양한 자세에는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들이 담겨 있다. 그 상징과 전설의 맥락을 잘못 이해하면 전혀 다른 종착점으로 귀결된다. 속담에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보다는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손가락으로 바르게 달을 가리켜도 손가락만 보고 그곳에 달이 없다고 하면 난감하기 그지없다. 손가락이 밉네, 어쩌네, 흠집을 논하지 말고 달을 살펴야 한다. 그래도 달을 못본다면, 더 이상 할 말도, 해 줄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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