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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은 백웅 이병희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수원에서 7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경기도청 이전과 수원화성 복원, 기업 유치 등 수원이 성장하는 과정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다. 그 뒤에는 중앙정부와 기업, 공직사회와 지역을 연결했던 그의 헌신이 있었다. 수원일보는 탄생 100년을 맞은 백웅 이병희 선생과 수원이 함께한 시간을 되짚어본다.
1960년대 초 수원은 경기도에 속한 도시였지만 정작 경기도의 중심은 아니었다.
수원을 대표하는 수원화성의 모습도 지금과 달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곽과 시설물 곳곳이 훼손되는 동시에 성곽 주변은 급격한 도시화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오늘날 수원을 설명하는 ‘행정중심도시’와 ‘역사문화도시’라는 두 정체성이 모두 제대로 갖춰지기 전이었다.
이병희의 정치적 발자취를 따라가면 서로 다른 두 시간이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하나는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을 수원으로 가져오는 일이었다.
1946년 서울과 경기도가 분리된 뒤에도 경기도청은 서울에 남아 있었다. 도청 이전지를 놓고 수원과 인천이 맞붙었다. 당시 인천은 항구와 산업기반을 갖춘 경기도의 대표 도시였고, 수원은 지리적 중심성과 교통 등을 내세웠다.
도청 유치는 단순히 행정기관 하나를 가져오는 일이 아니었다. 공무원과 관련 기관이 따라오고 도로와 주거, 상권이 형성된다. 무엇보다 ‘경기도의 중심도시’라는 상징성을 갖는 일이었다.
수원과 인천의 경쟁은 지역의 자존심을 건 유치전으로 번졌다. 공교롭게도 그 중심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인 두 정치인이 있었다. 수원에서는 이병희가, 인천에서는 유승원이 각각 도청 유치에 뛰어들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 과정에서 이병희를 둘러싼 유명한 일화도 남았다. 도청의 수원 이전을 관철하기 위해 삭발한 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다. 당시 이병희가 박 의장에게 “형님, 도청 못 옮기면 저 죽습니다”라고 읍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도청 유치에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는 의미다.
노력이 통했을까. 결론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963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경기도청 소재지를 수원으로 변경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노력이 통했을까. 결론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963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경기도청 소재지를 수원으로 변경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듬해 10월 팔달산 아래에서 신청사 기공식이 열렸고, 1967년 6월 경기도청이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이전했다.
수원이 명실상부한 경기도 행정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전환점이었다.
도청이 들어오면서 관련 기관과 사람들이 수원으로 모였다. 주변 도로와 주거지, 상권도 달라졌다. 팔달산 아래 자리 잡은 경기도청사는 이후 반세기 넘도록 수원과 경기도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경기도청사 이전을 통해 행정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면, 1970년대에는 반대 방향을 바라봤다.
수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1794년 축성을 시작해 1796년 완성했지만 20세기를 거치며 크게 훼손됐다. 일제강점기 도시개발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부 시설이 파괴되거나 사라졌고 성벽 곳곳도 무너져 있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개발의 시대였다. 오래된 것을 보존하는 것보다 도로와 공장을 만들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일이 우선되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수원화성을 대대적으로 복원하자는 구상이 구체화됐다.
1973년 당시 제1무임소장관이었던 이병희는 수원화성과 융·건릉, 용주사 등 정조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국가 차원에서 복원·정비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임수복의 회고 등에 따르면 이병희는 수원성곽뿐 아니라 정조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함께 정비하는 계획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화산대효원종합계획’이 만들어졌고 대통령 재가를 거치면서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구체화됐다.
1974년 경기도는 ‘수원성곽복원정화계획’을 마련했고 이듬해 장안문에서 복원정화사업 기공식이 열렸다. 이후 1979년까지 성곽과 주요 시설을 되살리는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진행됐다.
복원의 중요한 근거는 정조 시대 남겨진 ‘화성성역의궤’였다. 화성을 건설할 당시 공사 과정과 자재, 인력, 건축방식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둔 덕분에 훼손된 시설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시작된 복원은 이후 세대에도 이어졌다. 추가적인 복원과 정비가 계속됐고 화성행궁도 시민과 수원시의 노력으로 다시 모습을 갖췄다.
그리고 1997년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경기도청과 수원화성. 미래를 열었고, 과거를 품었다.
서울에 있던 도청을 옮겨 수원을 행정의 중심에 세웠고, 허물어져가던 성곽을 되살려 수원이 어떻게 시작된 도시인지를 되찾았다.
새로운 수원을 세우면서 오래된 수원을 지켰다.
이병희가 그렸던 도시의 밑그림에는 미래와 과거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