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1주년] “희망의 꽃” 외치다 '격문사건' 주도 … 광복의 하루를 채운 수원의 소년들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수원에도 찾아왔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태극기를 잡은 손이 하늘을 향했고 만세 소리와 함께 펄럭였다.
그러나 해방을 꿈꾸었다고 누구나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간절하게 나섰지만 끝내 그날에 함께하지 못한 수원의 소년이 있었다.
광복 15년 전인 1930년 5월 4일. 수원에서는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다.
“우리는 희망의 꽃이며 장래 행복의 열매인 것을 잊지 맙시다.” 어린이들과 주민 1500여 명이 수원 화성 안 운동장을 출발해 매화교와 장안문, 종로와 팔달문을 행진했다.
그 행렬을 이끈 건 수원소년동맹 간부 김장성과 홍종근이었다. 수원소년동맹은 소년의 권리와 노동소년 보호, 문맹퇴치 등을 내걸었던 조직이었다.
그해 여름, 홍종근이 신문 한 장을 들고 김장성을 찾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 전국에서 이어지던 격문 사건을 다룬 기사였다.
“수원에서도 해보지 않을래?” 김장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사일은 10월 12일로 정했다. 화성학원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날이었다. 화성학원은 현재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하루 전인 10월 11일, 두 사람은 홍종근의 집에서 격문을 썼다. 16장에 달했다.
내용은 명료했다. “조선총독부 폭압정치를 타도하자.”
12일 새벽, 두 소년은 거리로 나왔다. 팔달문 밖 사거리와 팔달문, 수구문, 화성학원 주변 전신주, 조선곡자회사, 수원청년동맹 운동장 등에 격문을 붙였다.
날이 밝자 수원이 술렁였다. 일제경찰은 운동회를 감시하고 사회단체 사무실과 화성학원, 청년운동가들의 집을 뒤졌다. 그런 와중에도 두 소년은 거리를 돌며 전신주와 입간판에 격문을 붙였다. 붙이는 곳마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글을 읽었다.
일제경찰은 수원지역 사회단체 관계자 30여 명을 잇따라 연행했다. 하지만 정작 격문을 쓰고 붙인 사람은 거물 독립운동가도, 이름난 지식인도 아니었다. 열여덟 살 소년들이었다.
11월, 수사는 김장성과 홍종근에게 닿았고, 결국 붙잡혔다. 김장성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수형번호 1672. 열여덟 살. 직업은 생선장수였다.
1931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이 확정됐고 김천소년형무소로 옮겨졌다.
홍종근은 1932년 1월 만기 출옥했다. 그러나 김장성은 감옥에서 병을 얻어 형기를 20여 일 남기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하지만 곧 숨을 거뒀다. 열아홉 살이었다. 동지들은 그의 장례를 ‘동지장(同志葬)’으로 치르고 수원 공동묘지에 묻었다.
13년이 흐른 1945년 8월 15일. 김장성이 바라던 해방이 찾아왔다. 그가 격문을 붙였던 팔달문에도, 사람들이 모여 격문을 읽던 거리에도 더 이상 격문을 붙일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정작 김장성은 해방된 수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어린이날, 스스로를‘희망의 꽃’이라 불렀던 소년은 그해 가을 직접 붓을 들었고, 탄압과 핍박에 맞서 자유를 외치다, 자신이 꿈꾸던 해방의 날보다 먼저 생을 마쳤다.
정부는 2010년 김장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광복절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 해방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 채 거리로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수원에서는 김장성과 홍종근 같은 소년들이 광복을 위한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