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사(城神祠) 중건의 당위성

특별기고 / 김우영 (사)화성연구회 이사

성신사는 화성의 성신을 모신 곳이다.

정조는 화성성역이 완료되는 시점에 수도 한성부의 종묘와 같은 공간 조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는 갑자년(1804) 양위 후 수원으로의 이어(移御)를 위하여 수원의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화성 성역시 서울의 제도와 같이 사직단, 문묘, 종각 설치와 더불어 성신사를 설치한 것이다.

정조는 성신사 설치를 지시한 것 뿐 아니라 완공 후 성신(城神)에 대한 고유문(告由文)을 직접 작성하기까지 하였다. 화성 성신사에 대한 애정은 정조가 낙성연에 직접 참석하여 제사를 주관하고자 하였으나 갑작스런 서울의 홍역 창궐로 인하여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원 행차를 취소하였다.

정조가 1796년 7월 11일 성신사 지을 터를 닦은 것은 상당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7월 11일이라는 날짜는 단순한 택일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정통성과 연관되어 있는 날이다. 1789년 7월 11일에 금성위 박면원의 상소로 인해 양주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永祐園)을 천봉하기로 결정한 날이다. 즉 1789년 7월 11일은 정조의 왕권 강화를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선포한 날이기도 하다.

이렇듯 정조에게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 7월 11일에 화성 성신사의 터를 닦은 것이며,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성신사는 화성에서 화성행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성신사는 화성유수부의 주산(主山)인 팔달산 병암(屛巖)에 성신사를 설치하여 수원 전체를 아우르는 곳으로 선택하였다. 이 자리는 현재 강감찬 장군 동상이 위치하고 있다. 이는 1971년 6월 29일 ‘애국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하여 기공한 것으로 1971년 10월에 준공되었으며, 1972년 5월 4일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수원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은 수원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물로 성신사 자리에 이 동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수원의 정체성을 살리는데 상당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성신사 터 일대는 지표조사시 기와 파편과 초석 일부등이 발견되어 그 위치가 더울 확실해졌다.

강감찬 장군 동상은 조각기법이 매우 화려하고 중장한 초대형 작품임으로 훼손을 방지하여 다른 공간으로 이전시키고 반드시 성신사를 복원하여야 한다. 이는 성신사의 복원이 단순한 화성의 여러 시설물 중 한곳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수원의 정체성을 살리고 정조의 깊은 뜻을 알리기 위함이다.

특히 성신사는 서울의 종묘와 같은 공간임으로 수원이라고 하는 도시가 일반 읍치와는 전혀 다른 수도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을 말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