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농사꾼 김성순 이야기'의 마지막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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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통신 정지환 대표기자 | ||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발제자로 나선 사람은 한신대의 김경재 교수와 후쿠요시전도소의 이누카이 미쓰히로(犬養光博) 목사. 발제문의 제목은 각각 '지구적 생명 현상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생명·평화'였다. 그런데 김 선생은 자료집을 보내면서 특별한 주문을 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두 개의 노트를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이누카이 목사의 발제문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한 것이다.
타고르,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 이어 동양에서 세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1935년생인 그는 1994년 '만년 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오에가 우리에게 특별히 다가오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개의 '노트' 때문이거니와, <세카이(世界)>에 각각 1964년(29세)과 1969년(34세)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히로시마 노트'와 '오키나와 노트'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읽혀졌다는 이 두 작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 이누카이 목사에 따르면, '히로시마 노트'와 '오키나와 노트'의 행간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공간인 '광주'(5·18)와 '제주'(4.3)가 각각 읽혀진다고 한다.
오에가 일본 국내에서 평화헌법 수호운동에 앞장서는 동시에 한국의 저항시인 김지하 구명운동과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뛰어든 인연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오키나와 전쟁. 연합군의 총공세로 본토가 위협받자 일본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지구전을 준비한다. 1945년 4월 1일 연합군 55만명이 오키나와에 상륙하며 시작된 지상전은 오키나와방어군 총사령관이 자결하고서야 끝났는데, 약 80일 동안 진행된 전쟁 기간에 오키나와 주민의 3분의 1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다.
그후 이 섬 곳곳에는 수 백개의 위령비가 세워졌고, 지금도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징병과 징용으로 동원됐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1만여 명의 한국인 희생자를 위해 세워진 위령비에 고개를 숙이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오에는 오키나와 남단 마부니 해안 평화기념공원 앞에 버려진 이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자성의 눈물을 흘리며 일본의 양심 회복을 촉구했다.
일본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우리 앞에 서 있다. '가와바타의 일본'과 '오에의 일본'이 바로 그것이다. 탐미주의를 내세우며 일본적 미학의 자기 도취에 빠졌던 가와바타. 그는 1972년 육상자위대의 궐기를 촉구하며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의 스승이기도 했다. 반면에 가와바타의 탐미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오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일본 천황이 수여한 훈장마저 거부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얼굴의 일본과 만날 것인가?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포도 농사꾼은 물었고, 우리는 답해야 한다.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