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칼럼] 정치인과 '말'

   
▲ 여의도통신 정지환 대표기자
경포대(鏡浦臺). 강원도 강릉시 저동의 경포호 북안에 위치한 누각의 이름이다. 말없이 서 있던 이 누각이 한동안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순전히 한 정치인의 '말' 때문이다. 손학규 경기도지사는 지난 12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공동의 정적'인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이 '경포대'라는 말을 사용했다. 가라사대 "요즘 신조어가 있는데 '경포대'라고 들어보셨나요? 이게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을 말합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한 이 발언은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 됐고, 여야의 거친 '말싸움'으로 비화됐다. 먼저 '열 받은' 열린우리당이 즉각 "대통령을 폄훼한 '경포대'란 말이 '경기도민도 포기한 대권병자'로 손 지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지 않으란 법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번에는 다시 한나라당이 "분노하는 민심에 비하면 '경포대'는 점잖은 표현"이라며 손 지사를 옹호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손 지사는 '경포대' 발언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 실제로 경기도 공보실은 지난 15일 성명을 내고 "손 지사는 강원도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의 신혼여행지는 강릉과 경포대 낙산사를 경유하는 코스였다"고 밝혔다. 손 지사는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면 진심을 담아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말도 잊지 않았는데, 30년 전에 경포대에서 찍었다는 신혼여행 사진까지 공개했다.

조금도 물러설 것 같지 않던 손 지사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만든 '외압'의 실체는 청와대도 국정원도 아니었다. 정작 손 지사를 무릎 꿇게 만든 것은 특정 지명을 말장난 거리로 삼은 정치 지도자에게 정중한 사과를 요구한 네티즌의 '민심'이었다. 한 네티즌은 "'삼천포로 빠졌다'는 용어를 함부로 사용한 토론자가 언제나 항의를 받았고, 당사자는 사과를 했다는 것도 참고하기 바란다"고 질책했다.

얼마 전에는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비난을 자초한 정치인도 있었다. 한나라당 총무를 역임하고도 결국에는 정계를 떠나야 했던 정창화 전 의원은 몇 해 전 국회에 출석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조롱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정 의원은 김 장관에게 "이장과 군수 하다 장관 되니까 기분 좋죠"라고 말했는데, 충북 옥천군 이장단이 "행정의 최일선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이장을 비하했다"며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일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몇 마디 말로 언론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정치인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사구시(實事求是)'는 폼으로만 강조할 뿐 실제로는 '허장성쇠(虛張聲勢)'에 집착하는 언론에도 문제는 있다. "손 지사는 '경포대 공방'으로 당내에서 차기 대선주자로서의 입지를 넓히고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데 일단 성공했다"는 한 언론의 솔직한(?) 분석이 그것을 잘 웅변해 준다.

정치인이 세 치 혀로 토해낸 독설이 일순간에 신문과 방송의 집중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이 기괴한 '저비용 고효율' 언론 시스템이 개혁되지 않는 한 구취(口臭)가 난무하는 '고비용 저효율' 정치 시스템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 곁을 맴돌 것이다.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