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칼럼] 방수 시계와 앨빈 토플러

   
▲ 여의도통신 정지환 대표기자
한 때 방수(防水) 시계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불었던 업체간 수심(水深) 경쟁 열풍은 자못 뜨거워서 마침내 2백50m 물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방수 시계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유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2백50m 짜리 방수 시계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과연 몇 명이나 존재하겠는가?

23개 기능 단추를 가진 '세계 최첨단 전기밥통'의 운명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 길을 걸었음은 물론이다. 도리어 일본의 가전제품 제조회사인 도시바(東芝)는 3개 기능 단추만 가진 '세계 최단순 전기밥통'을 만들어냈고, 가격을 기존 제품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뜨려 출시했다. 도시바는 세계 전기밥통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

지난 6일 개막한 산업혁신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그가 이번에 한국 사회에 던진 화두도 바로 앞에서 소개한 사례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는 기업이 지나치게 많은 기능을 담은 '초복합성' 제품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자동차를 구입했는데 계기판에 단추만 무려 49개에 이르고 안내책자도 700쪽에 달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의 경우에도 소비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기능은 워드 등 대단히 제한적인데 기능은 너무 많은 것 같다. 소비자가 실제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기능이 많은 '초복합성' 현상이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제품에 여러 기능을 덧붙이다 보면 정작 소비자에게 필요한 최적의 기능을 갖춘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는 오류를 빚게 된다. 초복잡성은 필연적으로 소비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소비자와 제품의 관계는 복잡해서는 안 된다. 소비자들이 원하지 않는 기능은 과감히 없애고 개개인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맞춤화 전략이 필요하다."

앨빈 토플러는 한국 경제의 진로에 대해서도 몇 가지 충고를 했는데, 필자로서는 다음과 같은 우회적 표현이 인상 깊게 받아들여졌다.

"핀란드, 스웨덴, 아일랜드가 규모가 큰 프랑스, 독일, 영국보다 훨씬 더 경제적으로 잘하고 있다. 작은 규모의 국가이지만 똑똑한 경제구조를 가진 국가들이 앞으로 잘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앨빈 토플러의 이러한 시각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도 비슷한 시각을 드러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절강성에 위치한 민영기업 완샹(萬向) 그룹을 이끌고 있는 루관치우 회장은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적합한 것을 찾을 뿐이다(不求最好, 只求最配)"라고 말한 적이 있다.

흔히들 말하기를, 기업의 목표는 가치창조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와 한국의 기업들은 과연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혹시라도 고객과는 철저히 유리된 채 세계 최초, 업계 유일이니 하는 허상만 좇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한국 정치의 고객인 유권자도 지금 그런 원초적 질문을 한국 정치에 에누리없이 던지고 있다.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