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등교 시간에 초등학교 교문 앞에 가보면 학부모들의 간절한 기원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서영아, 사랑해!” “좋은 하루 보내!” “교장 선생님께 인사 잘하고~” “여기 있을게, 잘 갔다 와~” “재미있게 지내고 와~” “사랑해!” “많이, 많이 사랑해!”…

정겨운 한 마디에 절대적 사랑과 기대가 배어 있어 따스하고 눈물겹다. 교육자가 아니어도 저 아이들을 지켜주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책무성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주로 초등학교 1, 2학년 부모의 경우지만 자녀가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이라고 해서 다를 수 없을 것이다.

횡단보도를 다 건넌 아이를 불러 굳이 사랑한다고 외치는 어머니, 아이들을 맞이하는 교장 선생님이 보이자 저만큼 걸어가는 아이에게 인사 잘하라고 부탁하는 어머니… 총총 멀어져간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돌아설 줄 모르는 아버지… 그 마음들을 요약하면 어떤 것일까? 우리 아이도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지내기를 기원하는 것이겠지? 공부 잘하면 더 좋지만 우선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바라고 있겠지?

우리가 이런 마음을 되새겨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코로나 사태 때문이다. 순식간에 학교의 모습이 바뀌고 교육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많은 것을 유보하고 있지만, 우리의 기원·기대가 달라진 건 아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교육이 지지부진해지지도 않았다. 주입식 말고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우리 선생님들은 암담한 상황을 제치고 교사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별안간 도입한 온라인 수업을 마치 그동안 늘 실시해온 양 능숙하게 진행하고 있다.

더러 화상수업에 참여하는 아이의 태도가 미흡하기도 하지만 그건 적절한 지도가 필요한 사례일 뿐이고, 아이 곁에서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학부모가 없진 않지만 그것도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쉬운 것은 지치도록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있어야 하는 사정이고, 소통도 되지 않는 일방적 온라인 강의를 시청해야 하는 지루함이다. 심지어 어떤 강의는,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사람이 늘어나 층간소음이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는데도 왕복 오래달리기로 장시간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도록 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TV 방송 프로그램을 연구해온 전문가들이 어떻게 그런 학습내용을 편성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례였다.

코로나 사태로 행정가들이 걱정하는 것은 대체로 기초학력 문제다. 그건 중요한 문제다. 그렇지만 기초학력쯤은 문제가 없는 아이들에겐 심각한 문제가 없을까? 학교교육이 평상시처럼 이루어지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결핍되는 부분이 기초학력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혹 학교교육의 목적을 겨우 기초학력 보장이라고 여기는 건 아닐까? 여러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생활하던 아이들이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지내는 것에서 느끼는 정서는 어떤 것일지 걱정스럽지 않은 것일까? 이와 달리 코로나 19로 등교하는 날이 적어져서 오히려 더 발전적인 경향을 보이는 긍정적 측면은 없을까? 그런 것에는 왜 관심이 적은 것일까?

지난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입학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고 통틀어 며칠 등교하지도 못했다. 그 아쉬움을 만회해주려는 듯 쌍방향 화상수업 시간에 아이들의 이름을 최대한 여러 번 불러주려고 애쓰는 눈물겨운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은 일일이 지시하거나 감독하지 않았다. 지식수업도 주입식으로 진행하지 않고 컴퓨터 화면 속에서도 질문을 유도하면서 개인별 특징을 발견하고 긍지와 의욕을 갖게 하는 감동적 수업을 전개했다.

그런 선생님을 보며 확신하는 것이 있다. 학생들을 전부 등교시켜 일상을 회복하려는 의욕도 필요하지만,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이런 상황에서는 위에서 일일이 지시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지혜를 모으고 자율재량권을 발휘해서 가르칠 수 있는 국가기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또 선생님들을 전체적·획일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조치보다는 개인별 권한과 재량을 확대해주는 것이 우리 교육을 선진화하는 첩경임을 깨닫게 된다. 이 사태를 계기로 우리 교육의 간절한 숙원에 답하는 교육과정 기준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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