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이시영, 「詩」 전문)

누구나 꿈꾸는 발화. 말이든 글이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마구 떨리면서 깊어”지길! 시는 더욱 그러하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이길 갈망한다. 화살이 박히기까지의 떨림과 긴 울림을.

하여 시는 늘 꿈꾼다. 더 놀랍고 더 깊은 여시아문(如是我聞)의 발화를. 그런 마음으로 시인은 세상을 읽고 살피고 그려왔다. 마음에 가닿을 그리움과 위로와 아름다움을 더듬더듬 담아왔다. 삶의 노래며 깨달음 그리고 뭇 사물의 귀띔 같은 것들과 함께. 그렇게 낮고 외롭고 힘없는 존재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픔에 더 많이 어깨를 기대온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첫 발성”일 것. 무릇 시의 어려움이다. 오직 언어로 대진하며 새로워야 한다는 것. 멜로디만 잘 타면 낡은 표현도 감동 만드는 노랫말과 다른 차원의 발견이며 발상이 전제되는 것이다. 하늘 아래 전혀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언어라야 사는 게 시의 숙명이다.

문화 내세울 때 군더더기 수사처럼 시적 상상력 운운하는 것도 그런 힘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조차 시는 별로 읽지 않는 듯하다. 아니 시집을 많이 사 읽지는 않는 것이겠다. 우리나라에 시인이 너무 많다는데, 정작 독자는 너무 적다. 시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게다가 시는 일단 ‘어렵다’로 접근성의 쉽지 않은 걸림돌을 안고 있다.  

그래도 詩! 하면 끌리는 설렘은 크지 싶다. 감각의 발견이나 속마음 열기에도 좋은 징검돌이다. 시는 세상의 그늘을 더 챙기는 만큼, 이해의 갈래도 오붓한 오솔길이다. 그렇듯 속 깊은 여시아문 시편들과 설렘을 나누다보면 떨림과 울림도 더 깊이 맞으려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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